다시 돌아온 본드걸? '007'의 고민
[김성호 기자]
동네 구멍가게 하나도 10년을 버텨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0년을 넘어 20년, 30년, 어느덧 체인점이 몇 개라거나 어느 음식의 원조라거나 몇 대째 이어 영업을 한다거나 할 정도가 되면 틀림없이 고객을 사로잡는 저만의 비결이라 할 것이 있을 터이다.
영업점 하나도 그러할진대 어마어마한 자본과 두뇌가 뒤엉켜 싸우는 영화시장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나 들고나는 속도가 빠른 액션, 첩보장르에서 60년 넘게 그 아성을 지켜온 시리즈라면 관객을 반하게 하는 매력이 틀림없이 있는 것이다. 60여 년의 역사, 25편의 작품을 이어온 < 007 > 시리즈 또한 마찬가지여서 사람들은 다른 첩보액션물과 구분되는 < 007 >만의 것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 007 스펙터 포스터 |
ⓒ 소니픽처스 |
미녀와 신무기, 다시 되찾은 시리즈의 상징들
시리즈 24번째 영화 < 007 스펙터 >는 잠시 밀어두었던 시리즈의 상징들을 다시금 껴안으려 시도한다. 어느덧 나이가 들었으나 여전히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미녀였다는 상징성을 간직한 모니카 벨루치, 또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배우 중 하나인 레아 세두를 기용해 제임스 본드의 여자, 즉 본드걸로 만든 것이다. 뿐만 아니다. 지난 몇 편의 영화에선 잘 보이지 않았던 장비들을 전면에 배치해 본드가 위기를 탈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끔 한다.
시리즈의 정체성을 생각하면 별반 대수롭지 않은 설정이지만, 지난 몇 편의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는 제법 흥미로운 선택이다. 2000년대 초반 들어 존폐의 위기란 말이 나돌 만큼 어려움을 겪은 시리즈가 새로이 제 정체성을 써나가며 기존의 상징을 멀리 밀어두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카지노 로얄>로 부활을 선언하고 <퀀텀 오브 솔러스>로 가능성을 탐색했으며 <스카이폴>로 역사를 쓴 시리즈는 다시금 제 정체성을 되찾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 007 스펙터 스틸컷 |
ⓒ 소니픽처스 |
모니카 벨루치와 레아 세이두
멘데스의 선택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시리즈가 놓아버려야 했던 것, 즉 본드걸과 화려한 장비의 복구였다. 이것이 없다면 시리즈는 잠시 동안은 < 007 >로 존재할 수 있어도 이내 여타 첩보액션물과 구분점이 사라진 작품이 되고 말리란 우려가 있었을 테다. <스펙터>가 맡은 역할이 그와 같아서 영화는 무려 2시간 20여 분에 이르는 긴 러닝타임 동안 모니카 벨루치와 레아 세이두라는 두 명의 유명 배우를 본드걸로 발탁해 전격 기용한다. 또한 기존에 활용된 것보다 많은 기능을 가진 무기를 활용하여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선은 본드걸이다. 특유의 매력을 발산하며 긴박한 순간에도 잘 빠진 미녀를 안는 제임스 본드의 모습엔 언제나 비판이 따랐으나 동시에 충분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영화와 본드 모두 여성을 그저 성적 대상으로만 활용한다는 점이 점차 큰 비판과 마주하기 시작했다. 특히 21세기 신흥 비평가 중에선 시리즈의 이 같은 모습이 여성을 성적 도구화하는 구시대적 연출이라 질타하기에 이르렀다.
▲ 007 스펙터 스틸컷 |
ⓒ 소니픽처스 |
정체성의 회복이냐, 과거로의 회귀냐
그러나 위기가 대두되고 영화의 틀을 완전히 새로 쓰는 과정에서 본드걸의 존재감 또한 달라지기에 이른다. 본드답지 않은 본드로 여겨졌던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그 시작인 <카지노 로얄>에서 베스퍼(에바 그린 분)와 만난다. 그녀는 이전의 본드걸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기가 민망하게 중대한 역할을 해낸다. 본드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그에게 은퇴까지 생각하게 할 만큼 마음 깊이 자리한다. 그리고는 그를 배신까지 하지만 본드는 그녀의 죽음을 영영 애석해하며 마음에 담아두기에 이른 것이다. 본드답지 않은 순정남 제임스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베스퍼의 죽음을 추적하겠다며 <퀀텀 오브 솔러스> 사태까지 일으켰던 그다. 그랬던 본드가 <스펙터>에 이르러 제가 죽인 악당의 아내(모니카 벨루치 분)며 저의 숙적처럼 맞섰던 악당의 딸(레아 세이두 분)까지 꼬셔내니 영화가 다시금 '옛 정체성'을 되찾았다는 해석이 무리가 아닌 것이다.
영화가 정체성의 회복에 진력한 건 다른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편에서 "이젠 그런 거 안 만들어요"하는 Q(벤 위쇼 분)의 대사처럼 화려한 장비로 눈길을 사로잡던 일이 종식됐음을 보인 시리즈였다.
▲ 007 스펙터 스틸컷 |
ⓒ 소니픽처스 |
유서 깊은 시리즈의 거듭되는 고민
다분히 < 007 >스러운 상징을 복구한 선택이 영화의 성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스펙터>는 그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쓰디 쓴 평가를 받아들었기 때문이다. 작품성 있는 영화를 여럿 만들더니 < 007 >까지도 그렇게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던 샘 맨데스가 명장병에 걸렸는지 영화의 규모를 너무나도 키운 탓이다. <카지노 로얄> 이후 제임스 본드가 상대한 모든 적들이 실은 한 비밀조직에 속해 있었고, 그 모든 계획을 주도한 것이 알고 보면 돌고 돌아 과거의 인연이라는 파괴적 설정으로 기존에 호평을 받았던 이야기조차 망쳐버린 탓이다.
뿐인가. 사막 한가운데 성처럼 쌓아둔 끝판왕의 비밀기지는 고작 폭탄 하나와 총 몇 발로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만다. 아무리 뛰어난 역량을 자랑하는 특수요원이라지만 본드는 <스펙터>에 들어 가히 괴력을 자랑한다. 권총으로 헬리콥터를 떨어뜨리지 않나, 3분 만에 초고층 빌딩에서 여자를 구해 탈출하는 등 전작과 비할 수 없는 역량을 과시한다. 이 모든 액션이 그만큼 강해진 상대에 대항하기 위해서라 할지라도 영화가 개연성이며 설득력을 크게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게 될 밖에 없는 것이다.
역시 오락영화는 오락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 해야 한다는 중론이 이어졌고, 샘 멘데스는 후속작 연출을 맡지 못하게 됐다. < 007 > 시리즈가 과거의 정체성을 조금 더 갖게 되었다는 걸 그만의 성취로 남겨둔 채로.
< 007 > 시리즈를 그답게 만드는 건 과연 무엇일까. 당대 최고 미녀들과 첩보원의 하룻밤 비밀스런 연애일까. 다른 어느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기상천외한 도구일까.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질문을 안고 이 유서 깊은 시리즈는 다음 편으로 넘어가게 된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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