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
[김삼웅 기자]
▲ 해방 후 다시 모인 조선어학회 구성원들. 1945년 11월 13일에 촬영된 사진에서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병기, 네 번째부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한 명 건너 정태진, 가장 오른쪽이 김윤경이다. |
ⓒ 한글학회 |
1942년 10월 1일 새벽 우리집에 들이닥친 두 명의 형사는 "잠깐만 같이 가자"고 했다. 무엇 물어볼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들을 따라나선 것이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의 시작이었다. '잠깐'이 뼈를 깎이듯 고통스런 3년간의 옥살이로 변했다. (주석 1)
일제나 해방 후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은 어김없이 "잠깐만 같이 가자"거나 "잠깐만 보자"고 끌어갔다. 그 '잠깐'이 어떤 이에게는 종신이거나 사망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희승의 경우는 그나마 일제의 패망으로 3년 간에 그치게 된 것이다.
먼저 이 사건의 개요부터 살펴보자.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주시해오던 총독부는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 회원, 1938년에는 흥업구락부 회원을 검거하는 한편,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여 언제든지 독립운동가와 민족사상가를 검거할 수 있는 '덫'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1942년 4월 원고의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인쇄를 하던 중 함흥에서 한 여학생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조선말로 대화하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취조를 받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총독부 경찰은 이 사건을 빌미로 서울에서 사전편찬을 하고 있던 정태진을 연행하여 심한 고문 끝에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다는 억지자백을 받아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이렇게 발단되어 10월 1일 이희승을 비롯 최현배·이중화·장지영 등 11명이 검거된 것을 필두로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구속되어 야만적인 수사와 고문을 당하였다.
일제는 33명 외에도 증인·기타 연루자 48명까지 검거하여 혹독한 고문을 하고, 조선어학회 회원과 사전편찬에 협력한 인사 모두를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걸어 기소하였다. 함흥재판소는 이들에게 "고유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 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라는 예심종결의 결정문에 따라 내란죄를 적용하고, 조사과정에서 가혹한 고문으로 이윤재와 한징은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요란하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깨어 대문을 열어주었더니 뜻밖에도 서대문서에서 왔다는 고등계 형사 두 사람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중 신(申) 모라는 한국인 형사가 "누군가 했더니 바로 이선생이군" 하고 알은 체했다. 신촌 지역 담당이어서 나를 알아보겠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잠깐 서까지 같이 가자고 했다. 가보면 알 것이라는 것이었다.
40이 넘도록 경찰서에 가야 할 일을 저질러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부모님과 집사람 그리고 중학에 다니는 아이까지 모두 잠에서 깨어 불안에 떨고 있었다. "죄지은 일이 없으니 별 탈이야 있겠는가" 하고 식구들을 안심시키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내가 채비를 갖추는 사이에 그들은 내 방을 샅샅이 뒤져 일기장과 국어에 관한 책들을 챙겼다. (주석 2)
일제 말기, 그는 우리글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역사의식과 민족정신 회복에 관심을 모았다. 그렇다고 직접 항일지하 조직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우리말 사전 편찬 등은 공인된 작업이었고, 한글운동 역시 당시에는 구속될 만큼의 사건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동지들과 함께 일망타진의 변을 당한 것이다.
영문도 모르는 채 끌려간 그는 경기도청 (현 정부종합청사 건너편) 안에 있는 경기도경찰부 유치장에 갇혔다. 그곳에서 다른 사건으로 입건된 무교회주의 종교철학자 김교신을 만나서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다.
몇 시간 뒤 장지영·최현배·김윤경 등이 차례로 옆방에 들어왔다. 비슷한 시각 이윤재·이극로·정인승·권승옥·한징·이중화·이석린 등은 본정서와 종로서로 끌려갔다.
이희승은 두손에 수갑이 채이고 얼굴에 용수를 씌운 채 기차로 홍원역에 도착하여 홍원경찰서에 갇혔다. 이극로·정인승 등은 함흥경찰서로, 이희승과 이윤재·권승옥은 홍원서에 각각 구치되었다.
그들은 어디선가 3인용 족쇄를 가져오더니 우리 세 사람의 발목을 족쇄 구멍에 넣고 자물쇠를 잠갔다. 족쇄는 작두처럼 생겨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우리는 말 한마디도 나누지 못하도록 감시를 받았다.
때가 되면 음식이라는 것을 주었으나 보리, 옥수수, 귀리 등을 제대로 익히지도 않은 주먹밥이었다. 그토록 험한 밥을 먹어본 일이 없는 터였으니 제대로 먹힐 리도 없었고, 생명 부지를 위해 억지로 먹는 음식이었으니 소화가 될 리 없었다. 당장 배탈이 났다.
가장 곤란한 일은 용변을 보는 것이었다. 용변을 보게 해 달라고 청하면 간수들은 처음 한두 번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하도 급해서 대여섯 차례 애걸을 하면 그제서야 그들은 짜증 섞인 거드름을 피우며 족쇄를 풀어주었다. (주석 3)
주석
1> <회고록>, 131쪽.
2> 앞의 책, 130쪽.
3> 앞의 책, 135~13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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