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조방 앞’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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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그러니 따라 했을 뿐 뜻을 새기지 않았다.
중학교 담임교사가 사는 곳을 물었을 때도 그냥 "조방 앞이요"라고 했다.
어른들 계모임이 있는 날이면 큰길 건너 시장에서 '조방낙지'를 먹을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그 조방이 조선방직 줄임말인 걸, 조선방직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였던 시절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면방직 회사라는 걸 조금 더 커서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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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그러니 따라 했을 뿐 뜻을 새기지 않았다. 중학교 담임교사가 사는 곳을 물었을 때도 그냥 “조방 앞이요”라고 했다. 어른들 계모임이 있는 날이면 큰길 건너 시장에서 ‘조방낙지’를 먹을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그 조방이 조선방직 줄임말인 걸, 조선방직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였던 시절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면방직 회사라는 걸 조금 더 커서야 알게 됐다.
방직산업은 한국 경제 산업화의 선봉장이자 주력 수출품이었다. 방직 관련 5대 기업은 1970년대까지 생산·매출 기준 10대 기업 안에 늘 자리했다. 방직산업은 산업혁명을 촉발한 ‘방아쇠’이기도 하다. 증기기관을 동력원으로 하는 방적기와 직조기 등장은 면직물 산업에 폭발적 성장을 안겼다. 이어 증기기관을 활용한 제철산업이 발달했고, 이는 철도·선박 등으로 확산해 산업혁명을 완성했다. 방직산업은 제국주의 수탈, 노동 착취라는 어두운 그림자도 갖는다. 일본 미쓰이그룹이 1917년 설립한 조방은 독점적 지위와 자본력 우위를 이용해 농산물을 수탈하고, 방직 과정을 거친 생산물을 다른 공장들에 비싸게 파는 이중착취를 일삼았다.
또한 방직산업의 출발선은 보호무역에 뿌리를 둔다. 산업혁명 이전 영국에선 모직물 산업이 번성했지만, 1700년 전후로 들어온 인도산 면직물 ‘캘리코’에 초토화됐다. 흡수성, 통풍성이 좋은 데다 값싼 캘리코는 모직업자를 파산으로 내몰았다. 직공들은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캘리코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국 정부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1720년 캘리코 수입과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방적기와 직조기가 등장했고, 증기기관의 발명이 여기에 불을 붙였다.
보호무역의 핵심은 ‘나만 잘살면 돼’이다. 세계 경제는 꽤 오랫동안 자유무역 깃발 아래 성장을 누렸지만 보호무역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윤진식 한국무역협회장은 지난달 27일 취임식에서 “미국의 대한(對韓) 수입규제 확대 가능성이 점증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윤 회장은 ‘보호무역주의 강화’ ‘자국 중심의 산업정책’을 언급하면서 수입규제 확대를 우려했다.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 확률이 높아지면서 ‘보호무역 시즌2’ 위기감은 커졌다. 트럼프는 재집권하면 ‘보편적 관세’ 10%를 기존 관세율에 추가하겠다고 공언했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라고 예외로 두지 않을 태세다. 이미 트럼프는 2018년 2월에 “무역엔 동맹이 없다”면서 대미(對美) 무역 흑자국을 대상으로 ‘호혜세(다른 나라에서 미국산 제품에 매기는 세금만큼 부과하는 수입세) 카드’를 꺼내든 전력이 있다. ‘보호무역 시즌1’이었다. 당시 한국은 세탁기, 태양광 패널, 철강제품 수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깊은 상흔은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대로 트럼프가 당선되고 극단적 보호무역을 바탕에 둔 시즌2의 문을 연다면 한국 경제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길지 두렵다. 여기에다 세계 경제는 더 빠르게 보호무역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글로벌 공급망·분업체계의 붕괴는 ‘나부터 살고 보자’를 부추길 수밖에 없다.
이게 현재 한국 경제를 둘러싼 지형이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라는 숙명 때문에 어떻게든 해법을 찾아야 하는데 무엇하나 간단하고 손쉬운 게 없다. 그래도 실마리는 있다. ‘보호무역의 역설’이라 불리는 방직산업이 그걸 보여준다. 수천년의 세월을 축적한 인도 면방직 산업을 이긴 건 영국의 보호무역이 아니었다. 캘리코를 밀어낸 건 혁신과 ‘초격차 기술’이었다.
김찬희 편집국 부국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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