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환자들이 돌아서면
진료 정상화 요구 서명운동
절박함 없는 의사 단체행동
야당조차 편들지 않아
국민의 시선은 갈수록 싸늘
어려워도 환자 곁에 서서
목소리 내야 하는 것 아닐까
의사들에 대한 인식은 종합병원 전공의들과 대학병원 교수들이 지켜왔다. 돈만 밝힌다거나 편안한 과만 선택한다는 세간의 비난을 돌려세우는 최전방에는 종합병원 전공의들이 있었다. 수술방에서 환자의 피와 분비물을 뒤집어쓰고, 병실에서 환자의 상처를 살피고 배변 상태를 점검하는 건 전공의들의 기본 역할이었다.
10여 년 전 어머니가 심장판막 수술을 받기 전 중환자실에서 흉부외과 전공의에게서 수술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고참 레지던트로 보였던 전공의는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설명은 명확했다. 심장판막 수술이 어려운 수술은 아니지만, 일정 시간 심장을 멈춰놓은 상태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돌발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얘기도 했다. 의학에 문외한이었지만 설명을 듣고 나니 수술 과정에 대한 의문은 없었다.
몇 년 후 아버지 수술 때는 간담도췌외과 전공의에게서 설명을 들었다. 간이식을 제외하곤 가장 큰 수술이라며 각 장기의 절제 부위를 그림을 곁들여 설명했고 수술 중 사망 가능성, 수술 후 부작용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확률은 극히 낮다며 안심시켰다. 단어 선택은 적절했고, 단호한 어조 속에서도 환자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수술 후에도 환자들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는 그를 보며 보수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억만금을 줘도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원하면 훨씬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음에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환자들을 수술하고 후학들을 양성하는 대학병원 교수들 역시 의사라는 이름을 지키는 이들이었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주치의이기도 했던 고 주석중 교수가 사고로 사망했을 때 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은 물론 특별한 인연이 없던 국민까지 그의 부재에 안타까움을 표시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대다수 국민은 범죄를 저지른 의사와 돈만 밝히는 의사를 손가락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사집단을 싸잡아 욕하지 않는다. 국민은 의사라는 단어를 생명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여전히 아껴놓고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조금씩 여론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의사들의 단체행동에 대해 ‘환자들을 내팽개친 이들의 제 밥그릇 챙기기’라는 비난이 ‘일방적인 정책 추진과 비과학적 수요조사 반대’라는 주장을 압도하고 있다. 보건의료노조와 중증환자단체가 조속한 진료 정상화를 요구하는 범국민 서명운동에 돌입한 것도 주목해야 한다. 간호사들이 주축인 보건의료노조와 의사단체의 대립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환자단체까지 나선 것은 간과할 일이 아니다.
의사들의 헌신을 평가하던 환자들과 국민들은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이 왜 의사들이 집단행동을 하는 이유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모르는 이들은 입 다물라”는 식의 발언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면허 박탈하려면 하라”는 반응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눈에 비치는 의사들 모습에는 절박함이 보이지 않는다. 의사들의 단체행동이 과연 국민을 위한 게 맞는지 의아해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자신의 목숨을 건 채 단식하고 고공농성하는 노동자들과 달리 의사들은 환자 목숨을 담보로 휴가를 내며 단체행동을 한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정부를 조목조목 비판해 왔던 야당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정부의 정책 강행을 총선 전 정치적 이슈몰이라고 물고 늘어지기도 어렵다. 환자가 등 돌리고, 가장 가까이서 같이 일하는 간호사들이 반대하고, 정치권에서조차 침묵하는 집단행동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사태가 장기화해 의료체계가 망가지면 정부도 타격을 입겠지만 가장 큰 고통은 결국 환자와 의사들의 몫이다. 환자들은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보게 된다.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사회와 환자를 위해 헌신한다는 이미지가 무너지면 의사에 대한 인식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 피해는 현 전공의와 의사들뿐만 아니라 앞으로 의사가 될 이들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의사의 힘은 보살핌을 받는 환자에게서 나온다. 의사는 환자를 돌볼 때 가장 힘이 세다. 정부 정책에 이의제기하려면 환자 곁에 서서 목소리를 내는 게 효과적이다. 국민은 환자를 지키는 의사의 목소리는 기꺼이 들을 준비가 돼 있다. 의사에 대한 사회적 지지는 그렇게 만들어져 왔다.
정승훈 디지털뉴스센터장 s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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