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시 전국 46일 버틸 석유 비축 ‘에너지 안보 최전선’
5일 찾은 전남 여수 한국석유공사 여수비축기지 지하공동은 군사시설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어둑한 터널 벽면에는 붉은색, 노란색, 회색의 배관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차로 5분을 이동하자 너비 약 15m, 높이 약 3m의 거대한 배관 설비가 눈앞에 나타났다. 여수비축기지 제3지하공동 T-461 저장소의 입구였다. 다만 완공 이후로는 실제 저장 공간에 입장하는 것은 불가능해진 상태였다. 안내를 맡은 김중배 석유공사 여수지사 시설팀장은 “현재 외부에서 견학이 가능한 구간은 여기까지”라고 선을 그었다.
실제 석유가 저장된 저유 동굴은 저장소 입구로부터 약 30m 아래에 있다. 지하공동은 석유를 저장하기 위해 물을 활용한다. 우선 지하 30~60m 사이의 암반을 파내 폭 18m, 높이 30m의 거대한 공동을 만든다. 이어 공동의 외벽에 물을 투입해 수막을 형성한다. 물과 기름이 분리되는 현상과 외부의 수압이 더해지면서 내부의 기름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는 구조다. 지상 저장 방식과 비교했을 때 지진 등의 재해에 비교적 안전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공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석유공사에 따르면 제3지하공동 안 저유 동굴의 길이는 총 4.5㎞에 이른다. 최대 1738만 배럴의 석유를 저장할 수 있는 크기다.
여수비축기지는 저장 용량이 5225만 배럴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 비축기지다. 석유공사는 1999년 제1·2지하공동과 입출하 부두 공사를 마쳤다. 이어 2007년에는 제3공동 공사를 마무리했다. 완성된 제1~3지하공동 저유 동굴의 길이는 총 13.8㎞, 총 저장 용량은 4725만 배럴에 이른다. 추가로 설치한 지상탱크 8개의 저장 용량도 500만 배럴 수준이다. 현재 여수비축기지에는 3986만 배럴 석유가 비축돼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이는 한국이 원유 수입 없이 46일을 버틸 수 있는 수준의 비축량이다.
곳곳에서 사람 몸통만 한 굵기의 배관들이 발견되는 것은 기지 지상도 마찬가지였다. 배관의 정체는 석유류를 비축·반출할 때 사용하는 원유배관망이다. 원유배관망은 부두로 들어오는 유조선과 기지 내의 저장 공간을 연결하는 ‘혈관’ 같은 역할을 한다. 연결을 마친 유조선은 펌프를 통해 시간당 6만4000배럴을 입하하고 5만4000배럴을 출하할 수 있다.
지상에서는 특히 인근 풍광과 대조되는 삼엄한 ‘군기’가 두드러졌다. 기지 전체는 사람 키보다 높은 철책으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철책에는 침입 감지 설비가 부착된 상태였다. 내부로 들어가도 군기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부두 출입구 같은 요처마다 전부 경비 인력이 근무하는 초소가 설치된 상태였다. 이들은 마치 군인처럼 경계 근무를 서면서 오가는 이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신원이 확인되면 큰 소리로 경례를 올렸다.
이는 여수비축기지가 국가핵심기반에 해당하는 중요 시설이기 때문이다. 기지에는 5조 3교대로 24시간 내내 경계 근무자가 근무하고 있다. 130대에 달하는 CCTV가 기지 전역에서 가동되고, 이를 일거에 지켜보는 상황실도 운영된다. 지난해에는 커지는 드론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안티 드론 시스템’을 설치했다. 기지 인근 상공의 수상한 물체나 움직임을 포착해 빠르게 알려주는 설비다.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석유 비축은 국가 차원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IEA는 회원국에게 최소 90일분 이상의 석유를 비축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석유를 전부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은 비축이라는 방어 수단 없이는 유사시 그대로 위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에 정부는 IEA의 의무 기준을 초과하는 넉넉한 비축량을 확보하고 있다. 한국은 현재 여수 등 국내 9개 비축기지에 전략비축유 9700만 배럴을 저장해 128일 수준의 비축량을 달성한 상태다. 9개 비축기지가 최대로 가용할 수 있는 저장 능력은 1억4600만 배럴에 달한다.
보통 여수비축기지를 드나드는 유조선은 1년에 25척 안팎이다. 하지만 국제적인 에너지 위기가 발생했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에는 세계적인 공급 위기에 대응해 IEA가 비축유 방출을 결의했다. 한국도 한 해 동안 1485만 배럴을 방출하면서 원유 수급난 해결에 일조했다. 김 팀장은 “(2022년에는) 60척이 넘는 유조선이 이곳 여수 기지를 찾았다”고 귀띔했다.
석유공사는 과거의 ‘정적인 비축’을 탈피해 석유 안보와 경제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동적 비축’으로의 전환도 추진하고 있다. 비축 목적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저장 공간을 효율적으로 운용해 수익까지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중동 산유국이나 국제 트레이딩 회사에게 사용료를 받고 잉여 물량 등을 비축해 주는 공동비축이 대표적이다. 비축 물량의 일부를 고가시 방출, 저가시 입고하는 방식으로 직접 트레이딩에도 나선다. 수소·암모니아 비축 인프라를 마련해 석유 위주였던 기존의 비축 사업을 다변화한다는 구상도 있다.
김동섭 한국석유공사 사장은 “석유 공급망 위기에 대비해 전략비축유를 확보·운영함으로써 국가 에너지 안보를 지켜왔다”며 “미래 에너지 패러다임 변화에 맞춰 석유와 액화천연가스(LPG)는 물론 청정수소, 암모니아, 바이오항공유까지 비축 사업을 확대한다는 구상”이라고 말했다.
여수=이의재 기자 sentin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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