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낯선 민주당

2024. 3. 12.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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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제 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선거 결과에 따라서 여야 모두 감당해야 할 정치적 부담이 만만치 않은 만큼 정치권의 관심은 온통 ‘누가 이길까’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선거를 바라보는 국민 입장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다음 국회에서는 정치가 좀 나아질까 하는 것이다. 21대 국회는 극단적 대결의 정치로 역할도 못하면서 국민을 피곤하고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각 당의 공천을 보면 다음 국회라고 해서 딱히 나아질 것 같지 않다. 현역 중심의 공천을 한 국민의힘도 문제지만 더불어민주당 쪽이 더 걱정스럽다. 한 친명계 의원의 표현대로, ‘당의 주인이 누군가를 확인하는 경선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이재명의 당’으로 민주당이 바뀐 것이다. 국회를 좌지우지해 온 거대 공당(公黨)을 두고 사조직처럼 주인 운운하는 것부터 틀려먹은 것이지만, 민주당의 문제는 단지 그 주인을 위한 정당으로 바꾸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 공천 논란 거치며 사조직처럼 변모
‘86 운동권’ 자리엔 ‘97 운동권’ 진입
이전의 민주당보다 훨씬 왼쪽으로
영국 노동당 좌편향 오류 경계해야

요즘 민주당을 보면서 갖게 되는 느낌은 ‘낯설다’는 것이다. 과거 민주당은 김대중의 관용과 통합, 노무현의 개혁이라는 색깔을 지니고 있었다. 김대중의 민주당이 이낙연 당으로 옮겨가고 노무현의 민주당은 쫓겨난 탓인지 모르지만, 지금의 모습은 그동안 우리가 알아온 민주당이 아닌 것 같다. 당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이재명의 민주당은 과연 어떤 색깔일까.

민주당의 공천 과정에서 눈에 띄는 건 운동권의 세대교체이다. 국민의힘 한동훈 위원장이 민주당을 겨냥해 선거 구호로 내세운 것이 운동권 청산이었는데, 언뜻 보면 친문 배제와 함께 이재명 대표가 나서 그 일을 해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실상은 한총련 출신 인사들의 발탁과 함께 ‘86 운동권’ 대신 ‘97 운동권’이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점입가경이다. 이들의 정치권 진입이 걱정스러운 것은 이들이 86세대보다 더 이념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군부 통치의 폭압이 있었던 80년대와 달리 90년대는 국내적으로는 민주화, 국제적으로는 탈냉전의 시대였다. 우리나라는 1987년 민주화되었고, 1990년대에는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대안 체제로서의 공산주의가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났다. 이렇게 변화된 국내외 정치 환경에서도 좌파 이념을 추종하고 친북 노선을 따른다는 건 이들이 이념적 근본주의자이거나 외골수의 이념 지향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의 진입으로 이재명의 민주당은 이전의 민주당에 비해 훨씬 왼쪽으로 나아갔다. 더욱이 이재명의 민주당은 과거 통합진보당의 후신인 진보당, 그리고 연합정치시민회의와 같은 강경 좌파 세력을 우당(友黨)으로 삼아 선거연대를 구축했고 이들이 국회로 나아갈 수 있는 뒷문을 열어 주었다. 이러한 이념적 좌편향과 함께, 김대중 대통령이 그렇게 강조했던 ‘서민과 중산층의 정당’으로서 민주당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아직 비례대표 후보가 발표되지 않았지만, 이런 추세라면 지역구 유권자에게 어필하기 어려운 강성 이념을 가진 인물을 비례대표로 밀실 공천할 수도 있다. 이들까지 포함된다면 민주당의 이념 편향성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의 이런 모습은 예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을 준다. 어떤 정당이 근소한 표 차이로 패배해서 권력을 잃었다. 그 패배는 경제 혼란과 사회 갈등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집권당에 대한 심판이었다. 야당이 된 후 당은 강경 노선으로 치우쳤고, 선거를 앞두고 당내 갈등으로 일부 세력이 탈당했다. 탈당한 이들은 다른 정치세력과 힘을 합쳐 선거 연대를 구성했다. 민주당 이야기 같지만, 이 정당은 영국 노동당이다.

1979년 ‘불만의 겨울’을 겪고 난 후 야당이던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당수가 노동당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표결 결과 311 대 310이라는 단 한 표 차이로 불신임이 가결되었다. 그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노동당은 권력을 잃었다. 그 뒤 강경 좌파인 마이클 푸트가 당수로 선출되었다. 노동당은 급속히 좌 편향되었고 당내 갈등도 격화되었다. 결국 로이 젠킨스 등 온건파 당 중진들이 탈당했고 이들은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과 연대를 맺었다. 그 뒤 치러진 1983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대패했다. 이전보다 10% 정도 득표율이 떨어졌고 1945년 이후 가장 적은 의석을 얻었다. 노동당이 권력을 되찾은 건 그로부터 14년 후 ‘새로운 노동당’을 주창한 토니 블레어가 중도로 당 노선을 바꾸고 나서였다.

좌편향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해도 어쨌든 이건 오래전 영국에서의 일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최근 변화가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는 결국 우리 유권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 다만 그동안 우리 사회를 갈라놓은 정파에 따른 정서적 양극화에 더해 이념적 격화까지 더해진다면, 다음 국회는 역대 최악이라는 21대보다 더 나쁜 모습을 보일 것 같다. 과연 우리 정치의 밑바닥은 어디까지일까.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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