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직선에는 하느님이 없다

2024. 3. 12.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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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 시인·목사

꽃샘바람이 아침부터 세차게 불었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봄나물을 뜯으려고 들판으로 나갔으나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칼바람이 너무 매워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빗장을 걸려고 하는데, 낡은 빗장이 바람을 못 견디고 툭 부러졌다. 이런, 이걸 어쩐다?

어쩌긴. 당장 만들어 끼워야지. 빗장을 걸어 대문을 닫아놓지 않으면 온종일 대문은 삐그덕~삐그덕~몸살을 앓을 것이다. 나는 농사 연장을 비롯한 잡동사니를 넣어둔 어둑한 창고를 뒤졌다. 지난해 가을 등산을 갔다가 희귀한 물푸레나무를 발견하고 도낏자루로 쓰려고 나뭇가지 한 가닥을 잘라다 보관해 둔 기억을 더듬어 너저분한 창고를 샅샅이 뒤져 기어이 물푸레나무를 찾아냈다.

「 세월의 아픔으로 생긴 나뭇결
구불구불 견디며 형성된 지혜
직진만 있는 직선의 삶과 대조

삶의 향기

‘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란 뜻의 이름도 싱그러운 물푸레나무. 그 나무 곁에 서면 내 몸도 푸르게 물들 것 같은 물푸레나무. 목질이 낭창낭창하고 단단한 물푸레나무는 도낏자루의 용도로만 아니라 옛 농부들은 도리깨나 소 코뚜레를 만들 때도 사용했고, 눈이 많이 오는 강원도 산간에서는 설피의 재료로도 각광을 받았다.

나는 창고에서 찾아낸 물푸레나무로 빗장을 깎기 시작했다. 어디서 목공 기술을 배운 적이 없지만, 낡은 한옥에 살다 보니 웬만한 것은 손수 깎고 고치고 수리하는 것에 나름 이골이 나 있는 터. 그런데 애써 깎은 빗장이 대문의 틀에 잘 맞지 않았다. 나무의 옹이 부분이 자꾸 걸려 몇 번씩이나 깎고 또 깎았다. 빗장을 완성하고 나니 한나절이 획 지나갔다.

완성된 빗장으로 대문을 잠그니 계속 삐거덕거리던 소음이 멎었다. 곁에서 빗장 만드는 걸 거들던 옆지기가 손뼉을 쳤다. 와우, 당신 참 대단해요! 언제 들어도 응원과 칭찬은 생기를 북돋워 주지.

연장을 다 정리한 후 난 쪽마루에 앉아 대문을 바라본다. 배웅과 마중의 감정을 지닌 대문. 오늘처럼 심하게 바람이 몰아칠 때 들리는 대문의 마찰음을 소음이라 했지만, 사실 나는 대문이 여닫길 때 나는 마찰음을 무척 좋아한다. 오죽했으면 대문을 ‘우주의 명창’이라고 불렀을까.

내 나이보다 연륜이 높은 대문. 우리 집 보물 1호인 솟을대문. 저 깊고 푸른 숲의 아름드리나무였을 적, 햇살과 바람, 비와 눈, 낮과 밤, 하여간 저 사계의 족적이 대문(大紋)으로 새겨진 대문(大門)의 문양도 사랑한다. 저 아름다운 문양이 나무에 새겨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계절을 구불구불 통과했을까. 나무들이 자란 숲길도 구불구불하지만, 나무의 나이테를 만든 시간 또한 구불구불하지 않았을까.

그날 밤 나는 대문을 바라본 소감을 몇 줄 시로 옮겼다.

“나는 문장을 짓는 사람인데./저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파릇파릇한 말씀을 받아적을 수 있을까./서까래만 한 큰 붓을 들고 있진 않지만/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대문장을 휘갈길 수 있을까.”

‘파릇파릇한 말씀’은 문이 여닫길 때 나는 소리와 아름다운 문양 때문에 연상된 시구인데, 그 파릇파릇한 말씀은 직선의 마음에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문명에 길들어 느림을 견디지 못하고 빠른 직선의 삶을 선택할 때가 있지만, 나무의 시간, 자연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이 자연의 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구불구불한 것을 견디지 못해 구불구불한 것을 기어이 직선으로 펴고 말 것이다.

직선이 무엇이던가. 우회하는 삶을 용납하지 않는 완고함, 다른 생명을 살필 줄 모르고 앞만 향해 분주하게 내달리는 마음. 직선으로 곧게 뚫린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내달리면서 도로 옆의 풍광을 즐길 틈이 있던가. 달리는 자동차에 야생 동물이 치여 숨지는 사고인 로드킬을 우리는 자주 목도하지 않았던가.

오스트리아 화가 훈데르트바서는 “직선에는 하느님이 없다”고 했다. 하느님이 없다는 말은 생명의 원천에서 차단되었다는 것. 직선을 애호하는 사람은 자기가 생명의 원천에서 차단되었다는 것조차 모른다. 이런 사람은 오직 가속과 직진의 욕망뿐이다. 나무의 아름다운 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그 아름다운 결이 불편과 아픔의 구불구불한 시간을 통과하면서 생긴 것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매일 솟을대문을 여닫으며 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문장을 갈망하지만, 그런 문장을 얻으려면 ‘사람보다 더 많은 사후(死後) 생’을 갖는 나무의 말 없는 말씀에 늘 귀 기울여야 하리라.

고진하 시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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