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의 영화몽상] 겁나 험한 것, 볼 만한 것, 보고 싶은 것
한국의 장묘문화는 쉽게 안 바뀔 것 같았다. 한데 변화의 물꼬가 트이자, 전통적 방식의 매장 대신 화장이 빠르게 보편화했다. 이런 시대에도 묏자리를 어떻게 쓰느냐가 후손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가 솔깃하게 들릴까. 기우였다. 적어도 영화 ‘파묘’의 흥행을 보면 그렇다.
개봉 20일도 채 안 돼 800만 관객을 모은 이 영화에는 묏자리 풍수에 더해 일제가 한반도 허리에 말뚝을 박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중장년 이상이라면 익숙할 얘기들이다. 장재현 감독은 ‘검은 사제들’, ‘사바하’ 등 이른바 오컬트 장르를 꾸준히 선보였다. 전작들에 비해 이번에는 장르 마니아보다 한층 폭넓은 대중으로 외연을 넓힌 듯 보인다. ‘파묘’는 꾸준히 극장을 찾는 젊은 관객만 아니라 중장년 관객이 개봉초부터 많았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전후반 크게 둘로 나뉜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상징 중에도 극 중 대사를 빌리면 “겁나 험한 것”의 정체는 이를 관통하며 미스터리를 이끄는 힘이 된다. 전후반 연결 등은 평이 좀 갈리는 듯싶은데 배우들의 연기는 대체로 호평이 들린다. 특히 김고은의 연기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감탄 일색이다. 그가 연기하는 젊은 무당이 고개를 살짝 까딱하며 굿판에 돌입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놀라운 연기다.
개인적으로 가장 놀라운 건 개봉 시기다. 명절 연휴 같은 극장가 전통적 대목이 아니라, 비수기로 여겨지던 2월 말 개봉했다. 지난해 개봉한 ‘서울의 봄’과 닮은 점이다. 이 영화 역시 극장가 비수기로 여겨지는 11월 말 개봉해 무려 1300만 관객을 모았다.
두 영화의 흥행은 성수기에 대한 통념을 바꿔 놓기 충분하다. 어쩌면 안 바뀌면 이상한 일이다. 연간 극장 관객 수 2억 명 시대는 옛말이 됐다. 2019년 정점을 찍은 연간 관객 수는 팬데믹으로 2년 연속 4분의 1토막이 났다가, 최근 2년 간 다시 늘었어도 2019년의 절반이 좀 넘는 수준이다. 단순 계산으로 5000만 국민이 매년 4번 넘게 극장을 찾다가 이제는 2번 넘는 정도란 얘기다. 성수기 감나무 밑에서 기다린들 예전처럼 수확을 기대하긴 힘들다.
관객의 선택을 받기 위한 경쟁은 한층 치열해졌다. OTT 구독은 이제 일상이다. 극장 개봉작끼리만 아니라 OTT에 수시로 쏟아지는 드라마·예능 시리즈 등과도 경쟁해야 한다. 게다가 신작이 볼만한 것이냐 아니냐는 반응은 소셜미디어와 유튜브 등을 통해 놀라울 만큼 빠르게 널리 퍼진다.
‘서울의 봄’이 12·12 쿠데타라는 현대사를 실감 나게 다룬 것도, ‘파묘’가 오컬트 장르에 일제강점기를 본격적으로 접목한 것도 최근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도다. 볼 만한 것, 보고 싶은 것이 관객을 부른다. 폭발적 흥행의 비결은 가장 단순한 데 있을지 모른다.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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