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런, 마침내 오스카

나원정 2024. 3. 12.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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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한국시간) 열린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오펜하이머’로 작품상, 감독상 트로피를 들었다. [EPA=연합뉴스]

“영화의 역사는 100년이 조금 넘었고 우리는 이 놀라운 여정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그 여정의 의미 있는 일부가 된다는 건 제게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습니다.”

11일(한국시간) 미국 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크리스토퍼 놀런(53) 감독이 오랜 무관의 설움을 씻었다. 놀런의 12번째 장편 연출작 ‘오펜하이머’가 작품·감독·남우주연·남우조연·촬영·편집·음악상 등 7관왕을 차지했다. ‘플라워 킬링 문’의 마틴 스코시즈, ‘가여운 것들’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등을 제치고 시상자 스티븐 스필버그로부터 감독상 트로피를 받은 놀런은 떨리는 목소리로 “세상을 얻었다”고 말했다. 제작을 겸한 그는 아내 겸 제작자 엠마 토마스, 찰스 로벤과 작품상 수상 무대에도 올랐다.

놀런 감독은 장편 데뷔작 ‘미행’(1998) 이후 ‘특수효과 귀재’로 불리며 흥행 감독으로 떠올랐다. 아카데미에선 배트맨 영화 ‘다크 나이트’(2008) 배우 히스 레저가 사후 남우조연상, ‘인셉션’(2010)·‘인터스텔라’(2014)·‘덩케르크’(2017)가 촬영·음향·시각효과 등 기술상을 받았지만, 정작 놀런 본인은 수상 운이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지난해 전 세계 3억2925만 달러(약 4320억원) 매출을 올렸다. CG(컴퓨터그래픽)를 쓰지 않은 원폭 폭발 장면, 배우들의 열연 등으로 최다인 13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오펜하이머’가 수상한 7개 부문 중 킬리언 머피의 남우주연상,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남우조연상 등 음악상을 뺀 6개 부문 수상자가 오스카상 수상이 처음이었다. 연기 경력 54년 만에 첫 오스카상을 품은 다우니의 수상 소감도 심금을 울렸다. 후보에만 두 차례(‘채플린’ ‘트로픽썬더’)에 올랐던 그는 “아내에게도 감사하다. 상처받은 강아지 같던 날 찾아내 사랑으로 키워줬다”며 “내 변호사도 45년 경력 중 절반을 날 구하는 데 썼다. 고맙다”고 벅찬 소감을 밝혔다.

올해 연기상을 수상한 배우들. 왼쪽부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더바인 조이 랜돌프, 엠마 스톤, 킬리언 머피다. [AP=연합뉴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여성판 ‘프랑켄슈타인’을 화려한 비주얼로 그린 ‘가여운 것들’은 후보에 오른 11개 부문 중 제작자 겸 주연 엠마 스톤의 여우주연상 및 미술·의상·분장상 등 4관왕을 차지했다. ‘라라랜드’(2016)에 이어 스톤의 두 번째 여우주연상이다. 등 부분이 뜯어진 드레스를 부여잡고 수상 무대에 오른 스톤은 “바로 전 ‘바비’ 주인공 켄(라이언 고슬링)의 주제가 공연 때 너무 신났나 보다”라며 “모두 함께한다는 게 영화 작업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했다.

올해 아카데미에선 뒤늦게 빛을 본 최초 수상자가 잇따랐다. 여우조연상은 수상 예측부터 만장일치였던 ‘바튼 아카데미’의 명문 사립학교 급식 조리사이자 참전용사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연기한 더바인 조이 랜돌프가 받았다. 각본상은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추락의 해부’ 각본을 쓴 쥐스틴 트리에 감독이 수상했다. 각색상은 상류층 흑인에 대한 선입견을 신랄하게 풍자한 코미디 ‘아메리칸 픽션’으로 감독 데뷔한 코드 제퍼슨이 거머쥐었다.

스타들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중지를 촉구하는 빨간 단추를 달고 나타났다. 반전 메시지는 수상 무대로도 이어졌다. 국제장편영화·음향상을 받은 나치 소재 풍자극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영국 감독 조나단 글레이즈는 “영화가 보여준 홀로코스트 문제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는데, 현재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 상황을 보면 너무도 비인간적”이라고 일갈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고발한 ‘마리우폴에서의 20일’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AP통신 취재진은 “이 영화를 만들 일이 없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며 “이 상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않은 역사와 맞바꿀 수 있다면 교환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떠난 별들’ 고 이선균 추모도

한편, 이날 시상식에서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영화인을 기리는 추모 공연이 열렸다.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 부자가 ‘타임 투 세이 굿바이’ 부르는 가운데, 고인이 된 배우 매튜 페리·마이클 캠본·제인 버킨·줄리안 샌즈,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 ‘기생충’의 배우 이선균 등의 생전 모습이 영상으로 흘렀다.

■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명단

「 ◦ 작품상 : 오펜하이머
◦ 감독상 : 크리스토퍼 놀런(오펜하이머)
◦ 남우주연상 : 킬리언 머피(오펜하이머)
◦ 여우주연상 : 엠마 스톤(가여운 것들)
◦ 각본상 : 쥐스틴 트리에 외(추락의 해부)
◦ 각색상 : 코드 제퍼슨(아메리칸 픽션)
◦ 남우조연상 :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오펜하이머)
◦ 여우조연상 : 더바인 조이 랜돌프(바튼 아카데미)
◦ 촬영상, 편집상, 음악상 : 오펜하이머
◦ 주제가상 : 바비(왓 워즈 아이 메이드 포)
◦ 음향상 : 존 오브 인터레스트
◦ 미술상, 의상상, 분장상 : 가여운 것들
◦ 시각효과상 : 고질라 마이너스 원
◦ 국제장편영화상 : 존 오브 인터레스트(영국)
◦ 장편애니메이션상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 단편애니메이션상 : 워 이즈 오버
◦ 단편영화상 :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 장편다큐멘터리상 : 마리우폴에서의 20일
◦ 단편다큐멘터리상 : 라스트 리페어 숍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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