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 드러난 ‘사교육 카르텔’… 현직교사, 조직 꾸려 ‘문항 장사’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출제에 참여한 현직 교사들이 거액의 뒷돈을 받고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만들어 사교육 업체에 팔아넘긴 ‘사교육 카르텔’ 의혹이 감사원 감사 결과 사실로 확인됐다.
사교육 카르텔은 교사와 사교육 업체의 일대일 거래를 넘어 문항 공급 조직과 출판업체까지 둔 피라미드 조직 형태를 갖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일타강사 모의고사 문제 판박이’ 논란이 일었던 2023학년도 수능 영어 23번 문제의 배경에는 EBS 교재 무단유출, 교육과정평가원의 중복 검증 누락 및 이의신청 부당처리 등 총체적 문제가 쌓여있었다.
감사원은 11일 이런 내용의 ‘교원 등 사교육시장 참여 관련 복무실태’ 감사 중간 결과를 발표했다.
감사원은 신속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교원 및 사교육 업체 관계자 56명을 청탁금지법 위반과 업무방해, 배임수증재 등 혐의로 경찰에 수사 요청했다.
이중 현직 교원이 27명으로 가장 많고 사교육 업계 관계자 23명, 수능 출제위원으로 참여한 대학교수 1명, 평가원 직원 4명, 전직 입학사정관 1명이 포함됐다.
감사원은 수능 영어 23번 문제 출제 경위를 공개했다.
이 논란은 대형 입시학원의 유명 강사가 만든 사설 모의고사 교재에 나온 지문이 2023학년도 수능 영어 23번에 그대로 출제되면서 불거졌다.
이 문제를 낸 대학교수 A씨는 2022년 10월 2023학년도 수능 영어 출제위원으로 위촉됐다.
A씨는 두 달 전인 8월 EBS 수능연계교재를 감수하면서 고교 교원 B씨가 문항 제작에 활용한 ‘Too Much Informaion(TMI)’ 지문을 알게 됐고 이를 무단으로 활용해 수능 23번 문제를 제출했다.
이는 EBS의 보안서약서 위반이다. EBS교재는 2023년 1월 출간 예정이었다.
문제의 ‘TMI 지문’은 그해 9월 대형 입시학원 일타강사 C씨가 만든 모의고사 문제집에도 실렸다.
평소 교원들에게 문항을 사서 모의고사를 만들어온 C씨가 또 다른 고교 교원 D씨에게서 TMI 지문을 산 것이다. D씨는 EBS 교재 집필로 B씨와 친분이 있었다.
수능을 주관하는 평가원은 수능 문항 확정 전 사설모의고사 문항과의 ‘중복 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평가원 영어팀은 2020년, 2021년에는 중복 검증을 위해 강사 C씨의 수능 모의고사를 구매했으나 2022년에는 합리적 이유없이 구매하지 않았다고 감사원은 밝혔다.
수능 영어 23번 문제에 대한 이의신청은 215건(전체 이의신청의 62%)이 접수됐다.
그러나 평가원은 이의심사 준비과정에서 해당 안건을 이의심사위원회 심사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감사원은 “이후 실시된 외부전문가 자문에서도 기준문항 판정기준을 평가원에 유리하게 해석하도록 유도하고, 강사 C씨의 모의고사를 2022년에만 구매하지 않은 이유도 거짓으로 설명해 결국 수능 23번 문항과 모의고사 문항이 중복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받아냈다”고 밝혔다.
감사원은 이날 오랜기간 조직적으로 고착화된 사교육 카르텔 사례를 공개했다.
사교육 카르텔의 핵심인 ‘문항 거래’는 수능·모의평가·EBS 수능연계교재 집필 경력 교원 등을 중심으로 사교육업체, 중간관리 교원, 다수 교원으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조직화 양상을 보였다.
고교 교원 E씨는 수차례 수능·모의평가 검토위원으로 참여한 경력을 바탕으로 교원 8명을 포섭해 문항 공급 조직을 구성하고 사교육 업체와 유명 학원 강사에게 수능 경향을 반영한 모의고사 문항을 공급했다.
E씨는 2019년부터 2023년 5월까지 2000여개 문항을 제작·공급해 약 6억6000만원을 수수하고, 약 3억9000만원을 포섭한 교사 8명에게 나눠줬다. E씨는 조세 포탈을 위해 배우자 명의 계좌로 돈을 받기도 했다.
고교 교원 F씨는 배우자와 함께 출판업체 설립해 본격적인 시스템화에 나섰다.
이들은 EBS 교재 집필 등을 통해 알게 된 현직 교원 35명을 섭외해서 문항 제작진을 구성하고, 문항을 공급받은 뒤 사교육 업체에 팔아넘겼다.
이를 통해 2019~2022년에 매출 약 18억9000만원을 올렸다.
또 다른 교원 G씨는 EBS가 교재 발간 전 최종검토를 위해 집필진에게 제공하는 파일을 몰래 빼돌린 뒤, 이를 변형·제작한 문항 8000여개를 만들어 학원강사에 팔아 5억8000만원을 받았다.
현직 교사가 사교육업체에 판 ‘내신 예상 문항’을 자신의 학교 중간·기말시험에 출제하거나, 현직 대학 입학사정관이 입시컨설팅 전문업체에 취업해 근무 중 알게 된 대학 내부정보를 이용해 자기소개서 작성을 지도한 사례도 발각됐다.
감사원이 발표한 내용은 중간 조사 결과여서 전체 카르텔 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교육부에 ‘사교육업체 연계 영리행위’를 자진 신고한 교원은 322명인데, 감사원은 이중 최근 5년간 5000만원 이상을 수수하거나 비위 정도가 심각하다 판단되는 교사들만 우선 조사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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