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로다주·엠마스톤 '패싱 논란', 봉준호 말이 떠올랐다
[이진민 기자]
세상에는 당한 사람도, 보는 사람도 헷갈리게 하는 차별이 있다. 예를 들어 해외 토크쇼에 출연한 한국계 미국인 연예인에게 "영어 잘한다"고 칭찬하는 식이다. 백인이 아닌 인종은 영어를 못할 것이란 선입견이 깔린 칭찬이기에 달갑지 않다. 그렇다고 칭찬한 사람에게 큰 악의가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어떤 종류의 차별은 일상생활에서, 선량한 사람의 말에 먼지처럼 달라붙어 있다.
11일(한국 시각) 미국 LA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6회 미국 아카데미(오스카)에선 때아닌 '패싱 논란'이 일었다. 해당 시상식에선 두 번이나 수상자가 시상자를 대놓고 '패싱'하는 장면이 등장하였다. 함께 서 있던 백인 시상자들과는 악수를 나누며, 정작 상을 건넨 비백인 시상자는 못 본 척 지나친 상황. #OscarsSoWhite(오스카는 너무 하얗다) 해시태그 운동까지 겪은 시상식에서 다시금 터진 '인종차별' 논란이다.
▲ 누리꾼들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엠마스톤의 ‘패싱’이 노골적으로 시상자를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 연합뉴스 |
지금까지 오스카는 전년도 수상자가 시상하는 관행을 따랐다. 작년 주요 부문을 휩쓴 건 동양계 배우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양자경이 동양인 최초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키 호이 콴이 생애 첫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예정대로라면 올해 오스카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의 시상자는 양자경과 키 호이 콴이었다. 그러나 오스카는 갑작스럽게 방식을 바꾸었다.
올해는 전년도 수상자를 포함한 역대 조연상, 주연상 수상자들이 무대 위에 함께 올랐다. 이에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 수상자를 호명할 때 무대 위에선 여러 배우가 영광의 순간을 기다렸다. 먼저, 남우주연상 수상이 이뤄졌다. 지난해 수상자 키 호이 콴이 수상자로 영화 <오펜하이머>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외치며 기뻐했다. 문제는 무대 위에 오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행동이었다.
▲ 배우 엠마 스톤이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양자경이 엠마스톤에게 트로피를 건넸지만, 그 트로피는 함께 서 있던 제니퍼 로렌스의 손으로 넘어갔고 마치 제니퍼 로렌스가 엠마스톤에게 상을 건네는 듯한 구도가 연출되면서 '패싱 논란'이 일었다. |
ⓒ EPA/연합뉴스 |
이러한 광경은 여우주연상 수상 때도 비슷하게 재현됐다. 양자경이 영화 <가여운 것들>의 엠마스톤에게 트로피를 건넸지만, 그 트로피는 함께 서 있던 제니퍼 로렌스의 손으로 넘어갔고 마치 제니퍼 로렌스가 엠마스톤에게 상을 건네는 듯한 구도가 연출되었다. 양자경을 대신하여 상을 건네는 제니퍼 로렌스를 또 다른 시상자 셀리 필드가 말리는 듯한 모습이 함께 송출되어 파장이 일었다.
누리꾼들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엠마스톤의 '패싱'이 노골적으로 시상자를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인종 차별이 아니냐", "애초에 수상 방식을 바꾼 것부터 이상하다", "누가 시상식에서 시상자에게 저렇게 하냐" 등 비판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또한 해당 장면을 두고 인종차별이다, 아니다로 의견이 갈리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엠마스톤의 행동에 고의성을 판단하는 입장도 있다.
대놓고는 안 하는 '미묘한 차별'의 민낯
비백인 배우인 양자경과 키 호이 콴을 지나치는 모습에 대해 '미묘한 차별(microaggression)'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미묘한 차별이란 1970년 체스터 피어스에 의해 등장한 단어로 미묘하게 모욕적이고, 공격적인 차별 행동을 지칭한다. 이는 일반적인 차별과 다르다. 노골적으로 상대방을 무시하겠다는 의도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타인에게 모욕감을 주는 작은 행동을 의미한다.
미묘한 차별의 특징은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애매모호하고, 미묘한 방식의 차별인 데다가 의식적인 상황에서 벌어지지 않기에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가해자의 미묘한 차별은 개인 일탈이 아닌 지속적인 패턴을 지닌 사회적 차별이며 피해자에게 자기 의심, 고립 등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한다. 특히 차별에 대한 금지법이 제정되고 인종차별을 향한 비판이 거센 요즘, 이젠 미묘한 차별처럼 고의성이 없는 '선량한 차별'이 존재한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엠마스톤의 '패싱'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둘의 행동이 비백인 배우를 무시하겠다는 고의성에서 비롯했다거나, 해당 장면만으로 두 사람을 극심한 인종차별주의자로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백인 시상자와 스킨십하고 친밀함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비백인 배우를 쳐다보지 않는 행위는 미묘한 차별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오스카의 인종 차별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2015년, 2016년 오스카 시상식 주요 후보에 오른 20명이 모두 백인 배우였고 #OscarsSoWhite(오스카는 너무 하얗다) 해시태그 운동과 함께 백인들만의 잔치라는 오명을 얻었다. 또한 재미교포 감독 정이삭의 자전적 가족 이민사를 담은 영화 <미나리>와 중국계 미국인 가정을 그렸던 영화 <페어웰>이 '대화의 50% 이상이 영어가 아닌 경우 외국어 영화로 규정한다'는 기준에 따라 이민 서사를 담았음에도 외국어 영화상으로 분류된 바 있다.
이쯤 되니 봉준호 감독의 2019년 인터뷰가 떠오른다. "20년 동안 한국 영화가 미친 막대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한 작품도 오스카에 오르지 못했다"는 <벌처>의 질문에 봉 감독은 "오스카는 국제 영화제가 아니다. 오스카는 아주 로컬"이라 답했다. 비백인 시상자만 '패싱'한 두 명의 백인 배우, 끊이질 않는 오스카의 '인종차별' 잡음. 우연의 일치치고, 너무나 잦은 로컬 시상식의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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