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을까?
2024년 22대 총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준연동형비례제가 유지되었지만, 위성정당이 다시 출현하고 정치개혁의 필요성은 더 커졌습니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는 칼럼을 통해 유권자들의 시각에서 오늘의 정치를 비평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건 '꺾'이지 않는 '정'치개혁이니까요. <기자말>
[이재묵]
▲ 중꺾정 중요한건 꺾이지 않는 정치개혁!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가 정치개혁을 위해 필요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
ⓒ 참여연대 |
지난 2022년에 미국의 대표적 조사기관인 퓨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가 발표한 사회 갈등 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글로벌 조사에 포함된 19개 OECD 국가 중에서 한국은 같은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과 함께 가장 높은 당파적 갈등 인식 수준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에서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갈등을 어느 정도로 인식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매우 강하다(very strong)'라고 응답한 한국 응답자 비율은 49%로 해당 항목 기준 한국 다음으로 높은 응답 비율을 보여준 미국(41%), 말레이시아(38%), 프랑스(35%) 등과 비교해서도 높은 갈등 수준을 나타냈다. 한국은 당파적 갈등이 '강하다(strong)'라고 시민들이 응답한 비율 또한 41%로 '갈등이 없다(1%)'라거나 '갈등 수준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not very strong, 9%)'고 응답한 비율과 비교해 무려 9배나 높았다.
한국은 권위주의 독재 국가가 아니며, 하나의 생각과 이념만을 정답으로 강요할 수 없는 다원적 민주주의 사회이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일정한 입장과 견해 차이에 기반한 갈등과 대립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한 정치과정에 개입하는 적정 수준의 사회적 긴장은 대의제의 작동에 좋은 윤활유로 기능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 일찍이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E. Schattschneider)는 갈등을 '민주주의의 엔진'이라고도 하였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정서적 양극화의 확산
그러나 최근 한국 사회의 진영 갈등과 정당 양극화 수준은 민주주의의 작동에 적절한 긴장과 자극을 주는 수준을 넘어 전체 공동체와 민주주의의 존립 기반마저 위협해 들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 문제가 더 근본적이다. 특히, 현재 한국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는 유권자들의 정책 이슈에 대한 태도나 이념 성향의 차이를 반영하는 이념 양극화(ideological polarization)보다는 주로 집단 정체성에 기반하여 상대 진영 사람들을 싫어하고 외집단(out-group)의 '다름'을 관용하려 하지 않는 소위 '정서적 양극화(affective polarization)'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더 문제다.
정서적 양극화의 결과로 유권자들은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 집권하게 되는 경우 정부 운영이나 국정 결과물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편향되고 왜곡된 평가를 내리기도 하고, 나아가 그 정당성을 의도적으로 부정하려 하기도 한다. 게다가 최근 국내외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한국 사회의 정서적 양극화는 비단 정치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친구 맺기, 배우자 선택 등 일반적 사회관계를 형성하는 데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정서적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상대 정당과 그 지지자들에 대한 거부감과 편견을 표출하고 타 집단을 관용과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에서 물리쳐야 할 적대세력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병리 현상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으며, 이러한 병리가 정치 영역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런데 이 정파적 양극화 문제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불거지고 있는 민주주의의 퇴행(democratic backsliding)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스웨덴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V-Dem)가 발표한 전 세계 민주주의 상태 보고서에서 한국은 최근 폴란드, 홍콩 등과 함께 민주주의 퇴행이 빠르게 진행 중인 국가로 언급되는 불명예를 안기도 하였다.
과거 1970-80년대 민주주의 붕괴 위기는 군부나 독재 세력에 의한 폭력적 전복이나 비정상적 위협에 의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최근 미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민주주의 국가에서 관찰되고 있는 위기 현상은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집권 세력과 그 지지자들이 민주주의 제도와 절차를 악용하여 민주주의 가치와 원칙을 내부로부터 침식해 들어간다는 점에서 위기의 성격이 더 근본적이다. 민주주의 연구의 권위자인 정치학자 쉐보르스키(A. Przeworski)는 이러한 내부로부터의 잠식해 들어오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을 보이지 않는 전복 위기(subversion by stealth)라고 일컫기도 하였다.
정서적 양극화의 심화는 민주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그들'과 '우리'의 마치 다른 '부족'처럼 구분하게 하여 나(우리)의 당파적 이익을 우선한 나머지 상대에 대한 관용과 타협 같은 민주주의 가치를 쉽게 희생시키는 이해타산적 계산을 마다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즉, 당파적 대립의 심화는 '그들'과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민주주의라는 '공유재'를 지키는 것보다는 나와 우리 편의 이익을 수호하는 것이 더 옳고 합리적이라는 그릇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해악적이다. 시민들 스스로 양극화의 덫에 빠져 나 자신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합리적 판단을 놓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권자가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는 방법
따라서 정치적 양극화의 심화로 민주주의의 엔진이 고장 위기에 처한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갈등을 정치과정으로 적절히 해소해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최근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른 하버드 대학의 레비츠키(S. Levitsky)와 지블렛(D. Ziblatt)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에서 저자들은 민주주의를 지탱해 주는 것은 법과 제도만이 만사가 아니며 사회적 관용과 자제 같은 민주적 규범(norms) 또한 큰 역할을 담당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정치적 양극화의 심화에 따라 내집단의 당파적 사익(私益) 추구에 뒷전으로 밀려난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고, 민주주의 가치와 규범을 되살릴 방안을 고민해 봐야 한다.
우리는 지난 2022년 대선에 대해 아주 유감스럽게도 '비호감 대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멸칭을 허용하였다. 대통령 선거 직후 당선자는 사회 통합을 주요한 사회 당면 과제로 언급하였지만,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의 양극화 해소나 개선의 실마리가 잘 관찰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 진영 대립 구도는 더 공고해지고 갈등 정도는 더 증폭되어, 이러한 정치 진영 간 감정적 골이 민주주의를 위협하지는 않을까라는 위기 인식이 더 팽배해졌다.
우리는 2년 만에 다시 전국 단위 선거를 앞두고 있다. 거대 양당 중심의 양극화된 정치 구도를 지양하고 사회 각 부문에서 분출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정치 과정에 반영하고자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높여달라는 요구가 넘쳤지만, 이번에도 유감스럽게도 선거제도 개혁은 제자리걸음에 머물렀고, 오히려 비례 의석은 1석이 줄어들었다. 이제 유권자가 나서 투표로써 다원적 민주주의를 지켜나가고, 혐오와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인들을 심판해야 한다.
상대편이 당선되는 게 싫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눈을 감고 우리 편을 무조건 찍고 나서 바로 후회하거나 4년 내내 찜찜해하는 투표가 아니라 내가 진정 지지하는 정치인과 정당을 위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 생각이 달라 경쟁은 하지만 상대를 인정하고 타협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상식이 있는 훌륭한 정치인들에게 유권자들이 힘을 실어줘야 할 것이고, 그래야 우리 국회와 대의민주주의가 한 발짝이라도 진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이재묵 교수가 작성했습니다. 참여연대 홈페이지와 슬로우뉴스에도 게재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윤 정부, 낙수효과 전부 끊어...총선에 서민 재산권 달렸다"
- [단독] 선관위 "MBC '파란색 1', 선거법 위반으로 보기 어렵다"
- '감산 30%' 극복 못한 박용진, 정봉주에게 패배
- 대통령 고발장 쓴 변호사 "윤석열·이종섭은 공범"
- 유년시절을 함께 한 '드래곤볼 아버지'의 죽음... 먹먹하다
- "'낙서 테러' 경복궁 담벼락 복원, 그게 저희가 하는 일이에요"
- "용산구청 잘못, 더 구체적이어야"... 판사 질문 쏟아졌지만 검찰은 '침묵'만
- [박순찬의 장도리 카툰] 매장
- '의대증원' 총선까지 밀어붙이기, 과하면 역풍분다
- '경선 탈락' 박용진 "민주당 승리 위해 헌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