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이어지는 인연은 곧 삶을 지속한다는 것
[김형욱 기자]
▲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포스터. |
ⓒ CJ ENM MOVIE |
24년 전 서울, 12살 동갑내기 단짝친구 문나영과 정해성은 서로를 향한 감정을 키워가던 중 어쩔 수 없이 헤어진다. 나영네 가족이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을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 못한 채 헤어졌고 그렇게 연락이 끊긴다. 이후 12년의 시간이 쏜살같이 흐르고 그들은 재회한다.
해성이 오랫동안 페이스북으로 나영을 찾고 있었는데 당연히 찾을 수 없었다. 나영이 노라로 이름을 바꿔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노라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해성에게 연락이 닿아 스카이프 영상통화를 시작한다. 이후 밤낮없이 영상통화를 이어가는 둘. 하지만 비대면이 아닌 대면하기 힘듦에 지쳐 각자의 삶을 살기로 하고 연락을 끊는다.
노라는 아서와 만나고 해성도 다른 여성과 만난다. 그렇게 각자의 삶을 영위하다가 또다시 12년이 흐른 언젠가, 둘은 24년 만에 미국 뉴욕에서 조우하기로 한다. 해성은 여자친구와 헤어져 힐링여행을 떠나는 거라고 했지만 사실 노라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드디어 만나는 둘은 무슨 얘기를 할까. 그들 사이에 무엇이 오갈까. 또다시 어떤 식으로 헤어질까.
보편성을 띈 한 사람의 내밀한 이야기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제목이 핵심이다. 영어 'past lives'를 직역하면 '전생'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분히 동양적이고 또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단어로, 연출과 각본을 맡은 셀린 송 감독의 영향이 크다 하겠다. 어릴 때 캐나다로 이민 갔던 그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영화로 옮겼다는데 그 과정에서 전생과 인연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는 선댄스 영화제와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크게 화제를 뿌리고 미국 내 수많은 비평상을 휩쓴 후 아시아계 여성 감독으로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오르는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아쉽게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이미 이례적인 성공의 타이틀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다. 북미에서 1천만 달러 이상의 흥행을 이룩하기도 했다.
한 사람의 내밀한 사적 이야기가 이토록 많은 이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사실 그동안 이런 경우를 많이 봐왔다. 그저 누군가의 이야기일 따름인데 다른 누군가가 공감하고 열광하기까지 하는 경우를 말이다. 물론 디테일에 있어 손을 많이 본 결과물이겠지만 개별적인 이야기가 보편성을 띄는 건 언제나 신기해서 환영한다.
전생, 인연이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한 슬픔
<패스트 라이브즈>는 흔한 첫사랑 멜로가 아니라 제목으로도 친절하게 알려주는 대로 전생, 인연에 관한 이야기다. 삶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어떻게 사는 게 맞느냐고. 그러다 보면 결국 '나'라는 존재가 남는다. 인연이라고 하면 관계, 즉 타인을 중점에 두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다른 것 같다.
해성과 나영이 어렸을 때 헤어진 건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으나, 12년 후 영상통화로나마 다시 조우한 건 해성이 나영을 찾고 나영이 화답한 결과였다. 또한 그들이 다시 각자의 시간으로 헤어진 건 어느 누가 모든 걸 뒤로한 채 다른 누구한테로 달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12년이 흘러 대면한 건 해성이 직접 나영을 보러 바다를 건넜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영 또는 해성의 의지가 발현되었기에 그들은 다시 만났고 또 헤어졌으며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상대방이 혹시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전전긍긍 망설임은 의외로 보이지 않는다. 어찌하기 힘든 상황만이 그들 사이를 떨어뜨려 놓을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오묘하지 않나 싶다. 그간 느낄 수 없던,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번 생에선 어쩔 도리가 없네' 하는 말이 주는 묵직한 슬픔.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 삶을 지속한다는 것
어찌할 수 없음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음에도 그들은 서로를 찾으니, '지속'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관계를 지속하고자 삶을 지속하고, 삶을 지속하고자 관계를 지속한다. 전생과 현생, 그리고 후생까지 인연을 지속하고 싶다. 그러니 삶이 위대한 듯싶다가도 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아, 내가 이 순간을 위해서 여태껏 살아왔구나' 하는 순간 말이다. 영화에서 나영과 해성이 조우하는 순간들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12년이라는 시간 때문일까, 사랑인지 우정인지 모를 감정에 공감해서일까, 나도 살면서 그런 순간을 맛본 적이 있어서일까. 그저 보고 싶었던 사람, 반가운 사람을 다시 만나서일까.
나영과 해성, 해성과 나영은 어떻게 될까. 이 영화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으로 이어지는 '비포 트릴로지'의 축약판으로 읽기도 하는 바 오히려 이어지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사는 와중에 종종, 그러니까 이를테면 12년 주기로 한 번씩 보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그게 결코 슬프지만은 않다는 것, 인생에 그런 인연이 필요하다는 것, 그래도 살아간다는 것.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형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singenv.tistory.com과 contents.premium.naver.com/singenv/themovie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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