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귀를 기울일 이야기가 있다
[김성호 기자]
<400만 1906 The Four Million>이라는 책이 있다. '오 헨리'라는 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진 윌리엄 시드니 포터의 단편집이다. 이 소설집은 안에 든 작품보다도 제목으로 더 화제가 됐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다.
19세기 미국 뉴욕에선 수십 명의 인사가 화려하게 차려입고서 저택 응접실에서 만나 춤추고 대화하는 소위 사교계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중 사교계 저명한 인사로 소문난 사무엘 워드 맥알리스터라는 인물이 말하기를 '뉴욕에서 정말 만날 만한 인물은 400명 뿐'이라 했다는 것이다.
말인즉슨 사교계에서 통용되는 문화에 친숙하며 박식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 기꺼이 사귈 만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소위 중요한 인사가 400명으로 추려진다는 얘기다. 사교계에 정통하여 뉴욕의 인물을 두루 알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그가 실제 실명까지 기명하여 <뉴욕타임스>에 'The Only Four Hundred'라는 기사를 기고하자 이 사실이 당대 미국 사회에 크게 회자되기에 이른다.
▲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책 표지 |
ⓒ 사글사글 |
초보작가 10인이 길어올린 이야기
오래 전 들은 옛 이야기가 떠오른 건 최근 출간된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를 보면서였다. 책은 모두 열 명의 작가가 함께 지은 글 모음집이다. 에세이부터 단편소설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개성이 드러난 글을 함께 실은 것이다.
저자는 출간이 처음인 초보작가 열 명이다. 각자 생업에 종사하는 와중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결과 맺은 결실이 바로 이 책이다. 각자 삶의 현장에서 겪어낸 사건과 깨달음을, 또 그로부터 피어난 창작의 욕구를 그들은 각자의 글로써 피워냈다.
233페이지 작은 책 안엔 일상적 경험이 담긴 에세이부터 기발한 상상이며 감상으로 엮어낸 소설까지가 가득 들어찼다. 처음은 편집장의 중책을 맡았다는 '조은비'의 글이다. 모두 여섯 편의 짤막한 산문으로 이뤄진 글은 지난해 전세보증이 만료돼 이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직접 겪어낸 가슴 철렁한 이야기다.
전세계약 만기를 얼마 앞두고 이사를 준비하던 저자는 임대인들과 연락을 취하는 과정에서 어딘지 개운치 않은 느낌을 받는다. 임대인들과 연락이 잘 닿지 않았고, 매물을 올려 달라고 연락한 공인중개사는 보증금 반환문제가 발생할 시 제 책임이 아니라는 말부터 전해왔던 것이다. 우려했던 일은 이내 현실이 되고, 보증보험을 통해 보증금 반환을 받는 절차를 밟기에 이른다.
저자는 엘리베이터에 공고를 붙여 제 사정을 알리는 한편, 비슷한 일을 겪는 사람들을 모은다. 그로부터 인근에 비슷한 일을 겪은 이가 수두룩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무자본 갭투자 전세사기와 관련한 뉴스가 떠들썩했던 시절, 그 같은 일을 직접 겪어낸 저자의 이야기가 남다른 생생함을 품고 독자에게 가 닿는다.
일상 속 경험, 글이 되다
다음 실린 글은 방송국 기자로 일하는 '김차장'의 것이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차장 기자가 되었다는 그는 보이스피싱에 낚여 전 재산을 거의 잃어버릴 뻔 했던 이야기부터, 요리와 관련된 일화, 부하직원을 다루는 일에 대한 고민들을 두루 살펴 적는다.
'구니원'이라는 이는 엄마와 함께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의 추억을 소환한다. 평생 고생만 해온 엄마가 오래 꿈꾸었던 산티아고 여행길, 그러나 막상 찾은 그곳엔 고생만 있을 뿐 이렇다 할 특별함은 없는 것도 같았단다. 무언가 모를 서운함이 차오를 때 여행 전부를 바꿔내는 찰나의 감동이 읽는 이에게도 여행의 한 순간을 가까이 목격하는 듯한 감상을 일으킨다.
'이룬'이라는 필명을 쓰는 이가 뒤를 잇는다. 글에서 읽히는 그는 제법 정돈된 삶을 사는 듯한 모양, 내일을 오늘보다 낫게 하려는 의지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계획대로 만사가 풀려야만 편안했던 과거로부터 통제할 수 없는 삶을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해지기까지의 이야기, 또 무심코 스마트폰을 하는 일을 경계하여 그를 멀리하려 시도하였던 일들이 친숙하면서도 교훈적으로 담겼다.
어쩌다보니 사내 동아리 회장이 된 김도운의 글은 남달리 흥미롭다. 마음만은 젊지만 어느덧 중견이 되어버린 연차, 동아리 모임 뒤 뒤풀이를 하는 게 어린 직원들에게 부담일까 내심 고민을 거듭한다.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가 읽는 이에게 웃픈 감상을 일으키는 가운데,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마주할 법한 소소한 사건들이 한 편의 글로 태어나는 모습이 못내 기특하다.
김도운은 이밖에도 12년을 이어온 조정이라는 취미, 또 마침내 '8번'이라 불리는 중임을 맡아 대회에서 팀을 우승시키는 이야기를 재치 있게 풀어낸다. 글에선 삶을 윤택하게 하는 취미의 이로움과 그로부터 이끌려 나온 은근한 깨달음이 묻어난다. 건강한 삶이 빚은 건강한 글이 내는 향취가 있어 읽는 이를 기쁘게 한다.
누구에게나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엔 에세이 뿐 아니라 창작소설도 담겨 있다. 아마추어 작가들의 개성이 묻어나는 다양한 글이 읽는 이를 지루하지 않은 독서로 이끈다.
길 따라 걷는 이들의 이야기로부터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박상은의 '갈림길', 회사에서 얻은 상처를 여행에서의 만남으로 극복하는 'I'의 '시름이 갇힌 바다에도 윤슬은 반짝여', 막바지에 몰린 경주마와 그에게 유달리 마음을 써온 조교사의 이야기 김민구의 '마지막 추입마' 같은 소설이 문학이 뻗어갈 수 있는 여러 방향으로 멈춤 없이 나아간다.
김을해의 'A와 나'는 낯설지만 익숙한 어느 관계를 시작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그려낸다. 이성훈의 '도시의 이방인'은 도심 비둘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간세상의 독특한 풍경을 잠시나마 엿보게 한다.
편집장 조은비는 '삶에서 의미 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건 한순간'이었다며 '몸소 겪으며 느낀 것들을 기록해 한 권의 책으로 가둬 놓으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적는다.
'우리도 글을 쓴다면, 그리고 그 조각들을 묶어 조금이나마 누군가에게 웃음과 위로를 줄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했다는 그의 용기에 다른 작가 아홉이 화답해 만들어진 프로젝트,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는 누구나 제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면 잠깐이나마 숨을 멈칫하게 되는 이야기를 써낼 수가 있음을 일깨운다.
이로부터 나는 다시금 알았다. 적어도 서울엔 귀를 기울여 들을 만한 938만의 이야기가, 이 나라엔 마음을 가다듬고 읽을 만한 5175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여기 실린 건 그중 부지런한 열 명의 이야기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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