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적중 일타강사…그 문항, EBS집필 현직 교사가 팔았다

박태인 2024. 3. 1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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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강사가 지문을 적중시켜 논란이 일었던 2023학년도 수능 영어 23번 문제. 중앙포토

일부 일타 강사가 수능 문제를 적중시킨 건 우연이 아닌 ‘작업’의 결과로 의심되는 정황이 감사원 감사 결과 드러났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적한 사교육 카르텔의 단면이 드러난 것이다. 감사원은 11일 ‘교원 등의 사교육 시장 참여 관련 복무 실태 점검’ 중간 감사결과를 발표하며 “이번에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밝혔다.

감사원은 2023학년도 수능 영어 지문 23번과 동일한 지문을 수능 전, 자신이 출제한 문제집에 담아 적중 논란을 일으킨 일타 강사 A의 사례를 조사했다. 23학년도 수능 영어 과목에선 베스트셀러 『넛지』의 저자인 하버드대 교수 캐스 R. 선스타인이 쓴 『Too Much Information』(너무 많은 정보, 총 246p)의 79p 내용 중 일부가 나왔다. 당시 이 책은 한국 출간 전이었다.

이 지문을 이용해 문제를 처음 만든 이는 현직 고교 교사이자 EBS 집필진인 B였다. B는 2022년 3월 문제를 만들어 EBS에 납품했다. 이 문제는 2023년 1월 출간될 EBS 문제집에 실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를 만든 지 5개월 후인 그해 8월, EBS 교재 집필진으로 함께 활동하며 B와 가까워진 현직 교사 C가 이 지문을 그대로 활용한 문제를 A에게 팔았고, A는 이를 자신이 만든 사설 모의고사에 실었다.

별개로 23학년도 수능 출제와 EBS 문제집 검수를 동시에 맡았던 대학교수 D는 해당 지문의 문제 유형만 바꿔 그해 11월 치러진 수능에 출제했다. EBS에는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 감사원 조사 과정에서 이들은 “서로 모르는 관계”라거나 “우연의 일치”라고 주장했다.

2023학년도 수능 23번에 등장한 선 스타인 교수의 투머치인포메이션 표지. 교보문고 홈페이지 캡처

사설모의고사를 확인하는 등 수능 문제를 검증ㆍ관리해야 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역할도 부실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평가원은 유독 그해에만 A의 모의고사 문제집을 사전 검증 안 했다. 수능 후 수험생들이 이의 제기를 쏟아내자 평가원 관계자들은 “A의 문제집은 수강생만 접근할 수 있었다”고 둘러댔다. 또, 이들은 이의심사실무위원에게 ”지문이 같아도 문제 유형이 다르면 기출이 아니다“고 주장했고, 이 사안은 평가원 내부 종결 처리됐다.

그러나 A의 문제집은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살 수 있었고, 수능 출제 사전 워크숍에선 출제위원에게 ”사설학원의 지문과 똑같은 지문이 출제되면 안 된다“고 강조한 사실이 드러났다.

감사원은 일타강사 A와 현직 교사 BㆍC, 대학교수 D 및 평가원과의 유착 가능성을 의심해 해당 사안에 대한 수사 참고자료를 경찰청에 송부했다.

오석환 교육부 차관이 지난해 12월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사교육 카르텔부조리 범정부 대응협의회 결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현직 교사 다수가 가담해 문제를 사고판 정황도 포착됐다. 감사원에 따르면 수능 문항을 검토하거나 국가 주관 모의고사를 출제한 경력이 있는 현직 교사들이 피라미드식 조직(사교육 업체→중간 관리 교사→문항 공급 교사)을 꾸려 문제를 사고팔았다. 주로 대학 동문으로 묶인 현직 교사와 학원 강사는 서로 ”선배님“이나 ”후배님“이라 부르며 함께 골프를 치는 등 끈끈한 관계였다고 한다. 이들은 문제를 주고받을 때 텔레그램 단톡방을 활용하는 등 보안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고교 교사 E는 수능과 모의고사 출제 합숙 중에 알게 된 교사 8명과 짜고 2019년부터 2023년 5월까지 2000여개의 문항을 유명 학원 강사들에게 팔아 6억6000만원을 챙겼다. 이 중 E는 2억7000만원을 문항 제작비와 알선비로 챙겼는데, 2억1000만원은 배우자 등의 명의로 받았다. 다른 이들에게 3억9000만원을 나눠줬다.

2015년부터 EBS 수능 영어 교재를 집필한 고교 교사 F는 EBS 교재가 출간되기 전에 빼돌린 파일을 활용해 8000여개의 변형 문제를 만들어 유명 학원 강사에게 팔았다. 통상 EBS 문제집과 수능은 절반가량 연계된다. EBS 집필진이 학원가에서 주목받는 이유다. 지난해 EBS 문제집과 수능 연계율은 53.3%였다. 이런 식으로 2015년부터 2021년까지 F가 챙긴 돈은 5억8000만원. F를 비롯해 사교육 업체와 연관된 이들은 자신이 근무 중인 학교의 중간ㆍ기말고사에 해당 문제를 그대로 내기도 했다.

아예 부부가 짜고 별도의 출판사를 차려 문제를 공급하고 판매 수익을 챙긴 경우도 있었다. 현직 교사 G는 2018년부터 학원에 수능 문제를 공급해왔다. G의 아내는 2019년 6월 출판업체를 설립했고, G는 EBS교재 집필 등을 통해 알게된 현직 교사로 구성된 문항 제작진을 구성해 아내 출판사를 통해 사교육 업체에 문항을 제공했다. G부부는 2019년부터 2022년까지 문항 판매 대가로 18억 9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 중 12억5000만원은 거래 관계인 교사 35명에게 나눠줬다. 3억원은 G가 챙겼고, G 아내는 1억1000만원을 벌었다.

또 다른 현직 교사 H는 2017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다른 교원들과 함께 고난도 수학 킬러문항이 포함된 4000여개의 문항을 학원 유명 강사에게 팔고 8억7000만원을 받았다.

감사원이 11일 사교육 카르텔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진은 최재해 감사원장이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는 모습. 뉴스1

현직 교감이었던 I는 동문 선후배들과 문항제작팀을 따로 꾸려 2018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9200만원을 벌었고, 현직 입학사정관이 학원에서 일하며 학생들의 자기소개서 작성을 지도하고 돈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감사원에 적발된 현직 교사 중에는 학원에 문제를 판 이력이 있으면 수능이나 평가원 모의고사 검토 작업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숨긴 채 파견 근무를 한 경우도 있다.

감사원은 이런 식으로 카르텔이 의심되는 현직 교사 27명,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관계자 4명, 일타강사 A를 포함한 유명 학원 강사들과 사교육업체 관계자 20여명 등 총 56명을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현역 교원에겐 공무 외 영리활동을 금한 국가공무원 및 사립학교법과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 등이 사교육 업체 관계자들에겐 업무방해 혐의 등이 적용됐다. 감사원은 “학원에 문항을 공급한 교사가 학원 강사들과 별도 계약을 맺었더라도 이는 국가공무원법 등을 위반한 것”이라고 밝혔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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