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가 옛것들과 어울리네" 그 말은 진짜였을까
어린 시절 사극을 보며 품었던 활쏘기에 대한 로망을 30대가 되어 이뤘습니다. 대학원생으로 살면서 활쏘기를 통해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활쏘기의 매력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활을 배우며 얻은 소중한 경험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김경준 기자]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 시절, 앞으로 나가면 뭐 해먹고 살아야 할까 고민이 많았다. 역사가 좋아서 사학과에 진학했는데, 막상 전역할 때가 다가오니 복학하기도 싫고 공부도 지겨워진 것이다.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는 신조를 갖고 있는 나였지만, 그때만큼은 정말 미래가 깜깜하게 느껴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울 동대문 근처의 한 점집에서 사주팔자를 봤다. 사주를 봐주시던 분은 내 사주를 보더니 이렇게 딱 한 마디를 던지는 것이었다.
"사주가 옛것들과 잘 어울리네."
내가 역사, 전통 등등 '옛것들'로 벌어 먹고 살 사주라는 것이다. 역사 공부가 지겨워 찾았는데, 되레 저런 말을 들으니 '운명은 어쩔 수 없나보다' 싶어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 2013년 9월 15일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열린 무예24기 공연 당시 '기창'을 선보이는 기자의 모습 |
ⓒ 김경준 |
그러니 내가 최근 전통활쏘기(국궁)에 푹 빠지게 된 것도 운명이겠거니 싶다. 반면 희한하게도 양궁에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다. 평생 활을 한 번 잡아보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올림픽 때만 되면 양궁에 열광하는 모습들인데, 정작 활 잡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 나는 양궁 경기에는 그다지 흥미가 느껴지질 않는다.
오로지 민족의 역사와 전통이 깃든 국궁(전통활쏘기)에만 지독한 애착을 느끼고 있으니, 사주가 신통방통하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각궁을 잡는 이유
그래서인지 나는 활도 '각궁(角弓)'을 쓴다. 각궁이란 참나무, 산뽕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와 소힘줄, 물소뿔 등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 재료들을 결합하여 만든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활이다.
▲ 활 시위를 풀었을 때 각궁(왼쪽)과 카본 활(오른쪽)의 모습 |
ⓒ 김경준 |
각궁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니, 각궁에 비해 편리한 점이 많기는 하다. 전통적인 각궁은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보관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활 시위를 걸어 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이를 '활을 올린다'라고 표현한다)이 카본 활에 비해 조금 손이 많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 카본 화살(왼쪽)과 죽시(오른쪽) |
ⓒ 김경준 |
그래서 국궁에 입문하면 초심자들은 카본 활로 먼저 활쏘기를 익힌다. 그러다 나중에 본인이 흥미가 생기고, 재정적 여유도 뒷받침 되면 각궁으로 넘어가곤 한다. 대한궁도협회 규정에 따르면 5단 이상부터는 승단 심사시 각궁을 쓰도록 의무화했기에 승단 욕심이 있는 궁사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언젠가 각궁을 잡아야만 한다.
굳이 승단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각궁으로 넘어가지 않고 평생 카본 활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이미 카본 활에 익숙해진 마당에 굳이 '고비용 저효율'의 각궁을 잡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통을 사랑하는 사주의 소유자답게, 국궁에 입문한 직후부터 "언젠가 반드시 각궁을 잡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카본 활이 저렴하고 편하다 하더라도, 전통 방식으로 만들었고 선조들의 지혜가 집약된 우리의 전통 각궁을 잡아야만 '진짜배기' 전통활쏘기를 한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두 눈 질끈 감고 주문한 첫 각궁... "미루다 보면 결국 못해요"
감사하게도 각궁과의 인연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2022년 여름 전통활쏘기를 공부하는 한 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모임원들은 나만 빼고 전부 각궁을 쓰고 있었다. 옆에서 각궁 쏘는 모습을 보면서 그게 부럽기도 하고, 나만 없으니 살짝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카본 활보다 각궁이 훨씬 좋다고, 입이 마르도록 찬양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도 얼른 각궁을 잡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럼에도 계속 망설였던 것은 '비용' 때문이었다. 장인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일일이 만드는 각궁은 가격이 70만 원대로, 기껏해봐야 20만 원대인 카본 활에 비해 훨씬 비싸다. 화살은 또 어떻고. 각궁에만 쓰는 죽시는 한 발에 4만 원 가까이 되는데, 이는 카본 화살에 비하면 무려 4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2022년 기준).
아마 이런 만만찮은 비용 탓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느껴도 쉬이 각궁에 입문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한다. 더군다나 그때 당시 나는 일정한 수입도 없는 백수 신분이었기에 지금 당장 각궁을 잡는 건 더더욱 사치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취직을 하고 목돈이 좀 생기면, 그때 각궁을 잡아야겠다고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활쏘기 모임을 함께 하는 접장님께서 그런 내게 한 말씀 툭 던지셨다.
"미루고 미루다보면, 결국 늙어 죽을 때까지 못 해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간과 비용 등 이런 저런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 결국 실천하지 못했던 버킷리스트들이 생각났다. 결국 두 눈 질끈 감고 각궁을 주문했다. 그때 마침 학술회의에서 발표하고 받은 원고료 80만 원이 통장에 들어온 직후였는데, 이 피 같은 돈 역시 화살값으로 몽땅 날아갔다.
▲ 나의 1호 각궁 '범도(範圖)'. 예천에서 전통 방식으로 제작한 각궁으로 국가무형문화재 궁시장 보유자 김성락 궁장의 작품이다. |
ⓒ 김경준 |
[Tip] 국궁에도 '단'이 있다
대한궁도협회에서는 활쏘기를 장려하기 위해 태권도, 유도 등 다른 무술들과 마찬가지로 '단급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9순(45시)을 쏴서 본인이 응시한 급과 단에 해당되는 시수를 충족하면 통과한다. 기준은 아래와 같다.
1급(22중, 만 70세 이상 16중), 초단(24중, 만 70세 이상 18중), 2단(26중), 3단(28중), 4단(30중), 5단(31중), 6단(33중), 7단(35중), 8단(37중), 9단(39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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