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추격자 | 스리랑카는 어떻게 ‘실론티’의 나라가 되었을까
오늘은 퀴즈부터 시작. 세계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은 차는 무엇일까? 녹차? 보이차? 허브차? 모두 땡땡땡. 전 세계 차 생산량의 80%가량을 차지하는 홍차다. ‘홍차=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커피 외에 가장 자주 접하는 차도 홍차다. 그래서 다들 ‘홍차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다시 퀴즈 하나. 세계 3대 홍차는? 이 질문에는 쉽사리 답을 못하는 독자가 대부분일 터. 인도 다르질링홍차, 스리랑카 우바홍차, 그리고 중국의 기문홍차다.
3대 홍차는 특징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거의 이뤄지지 않는 정통 공정으로 제조되는 홍차다.
정통 공정은 뭐고 정통 공정이 아닌 것은 또 뭘까. 홍차 제조법 중 가장 흔한 공법이 ‘CTC’라 불리는 방식이다. ‘CTC’는 ‘Crush(으깨고)’ ‘Tear(찢고)’ ‘Curl(휘마는)’ 가공법으로 만들었다는 의미다. ‘CTC’ 용법으로 가공된 찻잎은 당연히 잘게 으깨져 있다. 품질이 일정하지 않은 찻잎을 한데 마구 섞어 일정한 퀄리티의 홍차를 대량으로, 그리고 빠르고 간편하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가공법이다. 채엽도 기계로 하는 만큼 비 오는 날을 포함해 채엽이 연중 언제나 가능하다.
전 세계 홍차의 90% 정도가 CTC 방식을 거쳐 만들어진다. CTC 방식은 가장 흔한 공법이지만 정통 제조법은 아니다. CTC 기계가 만들어진 후에야 공정이 시작됐을 것이므로.
정통 제조법은 찻잎을 사람 손으로 일일이 치대고 비빈 후 전체 잎 형태를 그대로 살려 만드는 방식이다. 인도 다르질링 홍차와 중국차는 거의 100%가 이렇게 만들어진다. 우바홍차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정통 제조법으로 만든 홍차와 CTC 홍차는 가격대가 다르다. CTC 홍차는 가격이 매우 저렴하고 대부분 티백으로 만들어진다. CTC 홍차는 품질이나 등급을 논할 여지도 없다. 최상품과 최하품의 가격 차이가 톤당 채 얼마가 되지 않는다. 수많은 서양 홍차 브랜드에서 나오는, CTC 홍차로 만든 차 가격이 틴당, 박스당 가격이 몇만원대에 불과한 이유다. 반면 정통 제조법으로 잎 전체 모양을 그대로 살려 만든 홍차는 가격이 훨씬 비싸다.
스리랑카 주요 차 산지 ‘우바’ ‘누와라 엘리야’ 등
스리랑카 우바홍차가 바로 실론티의 대표주자다. 실론티는 스리랑카에서 생산되는 홍차를 통칭하는 단어다.
1972년 전까지 스리랑카는 실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1972년 국가 이름을 스리랑카로 바꾸면서, 스리랑카의 가장 유명한 생산품에는 ‘실론’이란 이름을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아직까지도 ‘실론티’라는 명칭이 통용되는 배경이다. 지금도 관광객들이 스리랑카에 가면 가장 먼저 구매하는 기념품 중 하나가 ‘실론티’다. 전세계적으로도 실론티 브랜드는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스리랑카의 유명한 차 브랜드로 ‘베질루르’ ‘딜마’ ‘믈레즈나’ 등이 꼽힌다.
실론에 살던 영국 사람들이 차나무를 심고 차를 생산했다. 다만, 실론에서는 원래는 차나무가 아닌 커피나무를 심었다. 영국에서 파견된 실론 총독 에드워드 반스 경이 1824년 실론에 처음으로 커피나무를 심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영국인이 줄줄이 몰려와 스리랑카의 밀림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어린 커피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1860년경 실론 전역에 ‘커피녹병’이 돈다. 일명 ‘커피나무 잎마름병’. 잎이 말라가면서 나무째로 죽게 만드는 병이다. 당연히 커피농장은 초토화됐고, 커피농장 개척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여러 해 동안 커피나무를 가꿔온 영국 농장주들은 절망했다. 제임스 테일러도 당시 절망했던 영국인 중 한 명이다. 테일러는 그러나 마냥 절망하며 넋을 놓고 있는 대신, 다른 생각을 한다.
“커피나무 대신 차나무를 심어보면 어떨까?”
당시 전 세계에서 차나무를 길러 차를 생산하는 나라는 중국이 유일했고, 중국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차를 수입하던 영국은 어떻게 하면 중국 이외 지역에서 차나무를 기를 수 있을까에 골몰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제가 따라붙는다. 중국 정부가 반출을 엄격하게 금지한 차나무를 몰래 빼돌릴 수 있을 것, 그리고 역시 외국인에게 전수를 금지한 차 제조법을 알아낼 것. 로버트 포천이 이 두 가지를 결국 해내고 인도 지역에서 차나무를 재배하는 데 성공한다. 인도에서 재배되던 차나무 묘목 중 한 그루가 1867년 제임스 테일러 손에 들어왔다. 제임스 테일러가 ‘실론티의 아버지’가 되는 순간이다.
여기서 잠깐! 오늘의 영화는 2008년에 개봉한 <추격자>다. <황해> <곡성>으로 유명해진 나홍진 감독의 데뷔작이다. <추격자>는 영화 자체로도 유명하지만, 지금은 톱스타가 된 하정우가 ‘연쇄살인마’로 분해 나온 영화로도 유명세를 탔다.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추격자>는 전직 형사였던 출장안마소 주인 중호(김윤석 분)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아가씨들과 얽혀 있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지영민을 ‘추격하는’ 스토리다. 우여곡절 끝에 지영민을 잡아 경찰에 넘긴 중호. 그러나 지영민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고, 중호는 지영민을 다시 쫓는다. 그 와중에 지영민 집에서 망치를 맞고 쓰러져 있던 출장안마소 직원 미진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탈출해 동네 슈퍼로 들어가 경찰에 신고해 달라고 부탁한다. 슈퍼 아줌마가 경찰에 신고하지만 경찰은 오지 않고…. 그때 경찰서에서 풀려나 집에 가던 지영민이 담배를 사러 잠시 슈퍼에 들르는데….
하필 왜 실론티였을까. 특별한 이유도 스토리도 없을 확률이 높지만, 어쨌든 이때 하정우가 실론티를 시원하게 마시는 장면은 ‘하정우 대표 먹방’의 하나로, 아직까지 회자된다.
실론티는 캔음료 실론티로 유명하지만, 실제 실론티의 세계는 넓고도 깊다.
한국 지도를 놓고 호랑이다, 토끼다 하는 것처럼 스리랑카는 ‘찻잎’ 모양이기도 하고, ‘아보카도’를 닮았기도 하다.
실론을 아보카도 모양이라 할 때 아보카도 ‘씨’ 부근에 홍차 산지가 오밀조밀 들어서 있다고 보면 된다. 실론섬 중심에서 살짝 남쪽으로 ‘누와라엘리야’ ‘캔디’ ‘딤불라’ ‘우다 푸셀라와’ 등 차 산지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3대 홍차 산지로 유명한 ‘우바’도 인근에 위치해 있다. 이 외에 섬의 서남쪽 끝에는 ‘루후나’라는 산지가 외따로 떨어져 있다.
특히 스리랑카처럼 열대 지역 저지대에서 자라는 차나무 잎은 무성하게 빨리 자라고 또 찻잎이 다소 뻣뻣하다. 더 어린 찻잎이 비싼 것은 찻잎이 훨씬 부드럽고 그래서 차 맛도 한결 부드럽기 때문이다. 결국 저지대 차는 양은 많지만 품질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가격이 저렴할 수밖에 없다.
백만장자 식료품 업자에서 억만장자 차의 제왕으로
캔디 차가 중지대 차로 분류된다. 섬의 서남쪽 끝 루후나는 산맥이 끝나는 지역인 만큼 대부분 지대가 낮다. 저지대 루후나 차는 중동 사람들이 선호한다고 알려졌다.
실론티와 관련 제임스 테일러 못지않게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으니, 바로 ‘립톤’이다. 립톤 아이스티 할 때 그 립톤? 딩동댕. 그 립톤이다.
당시 파산한 다원 17곳을 사들인 립톤은 ‘다원에서 직접 찻주전자로’라는 슬로건을 걸고 실론티를 대량으로 영국에 팔기 시작했다. 립톤은 가파른 산비탈과 계곡에 위치한 다원의 찻잎을 평지로 운반하기 위해 최초로 케이블을 설치했다. 또 다들 차를 무게로 판매하던 시절에 품질과 신선도, 중량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며 개별 포장해 판매하는 등 차 장사에서 차별화를 시도했고 그게 제대로 먹혔다. 그렇게 백만장자 식료품 업자는 억만장자 차의 제왕이 됐다. 1898년 빅토리아 여왕에게 작위를 받아 토머스 경이 된 립톤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 1931년 8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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