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대첩마저 용두사미, '고려거란전쟁' 제작진의 패착
[이준목 기자]
'정통사극의 부활'을 외치며 화려하게 시작했던 <고려거란전쟁>이 어설픈 극본과 무능한 연출로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3월 10일 방송된 KBS2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 32회 최종회에서는 30년 여요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귀주대첩(龜州大捷)과 그 후일담이 그려졌다.
▲ KBS2 <고려 거란 전쟁> 관련 이미지. |
ⓒ KBS2 |
소배압(김준배)이 이끄는 10만의 정예 거란군은 1018년 세 번째로 고려를 침공한다. 상원수 강감찬(최수종)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삼교천 전투에서 거란군을 격퇴했으나, 정작 소배압은 고려 본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여 수도 개경을 급습하여 고려 국왕 현종(김동준)을 사로잡아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는 직도(直擣) 전략을 선택했다.
현종은 피신하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수도에 남아 끝까지 거란군과 항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고려군은 금교역 전투에서 개경의 상황을 염탐하러 온 거란군 척후대를 전멸시키는데 성공하지만, 소배압은 개경에 남은 병력이 얼마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전면 공격을 강행할 것을 지시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현종은 최후의 수단으로, 직접 개경의 모든 신하와 병사들을 이끌고 성밖으로 나와, 마치 대군이 거란군을 요격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다. 여기에 개경의 수많은 백성들도 자발적으로 횃불을 들고나와 항전에 동참한다. 소배압은 개경을 밝히고 있는 수많은 횃불을 보고 당황하고, 여기에 배후에서는 고려군이 턱밑까지 추격해 왔다는 소식에 고뇌하다가 끝내 개경 공략을 포기하고 철군한다.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 본군은 후퇴하는 거란군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귀주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인다. 전황 초기에는 고려군이 불리하게 전개된다. 주력인 기병을 수도를 지키기 위하여 보낸 고려군은 보병과 검차진만으로 거란의 정예 기병들을 상대해야 했다. 고려군은 거란군의 파상공격으로 보병들과 제1검차진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며 위기를 맞이한다.
고려군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겁을 먹은 병사들이 동요하며 전열이 완전히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이에 부원수 강민첨(이철민)은 도망가는 병사들을 베어서 전열을 통제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강감찬은 아무런 대답없이 병사들 속을 헤치며 검차진을 향하여 걸어간다. 강감찬은 "고려는 죽지 않는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라는 혼잣말을 되뇌이며 홀로 검차를 밀기 시작한다.
강감찬의 독려에 각성한 병사들이 하나둘씩 두려움을 이겨내고 다시 검차진앞으로 모여든다. 사기를 회복한 고려군은 거란군의 연이은 파상공세를 사력으로 다하여 막아낸다. 여기에 김종현이 이끄는 고려의 중갑기병대가 마침내 도착하여 거란군을 포위하며 전세는 완전히 역전된다.
치열한 전투는 마침내 고려군의 대승으로 끝내고, 거란군은 궤멸하여 소배압은 소수의 생존자들만을 이끌고 간신히 거란 땅으로 도주한다. 대패 소식을 들은 거란 황제 야율융서(김혁)은 크게 분노하지만, 끝내 소배압을 처벌하지는 못한다.
대승을 거둔 강감찬의 고려군은 수도 개경에 금의환향하고, 기쁨에 찬 현종은 문무백관과 백성들을 데리고 친히 영접을 나와 성대하게 승전의 공을 치하한다. 이후 국제적 위상이 크게 높아진 고려는 송나라로부터 거란을 함께 협공하자는 은밀한 제안을 받게 된다.
고심하던 현종은 강감찬의 제안을 받아들여 '복수를 위한 전쟁'보다 '평화를 위한 실리'를 선택한다. 현종과 강감찬은 각각 야율융서와 소배압에게 서신을 보내어 먼저 화친을 제의한다. 거란을 상국으로 예우하며 겉으로 체면을 살려주면서, 두번 다시 고려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라는 요구였다. 여요전쟁으로 정예병을 모두 잃고 협공당할 위기에 놓인 야율융서는 끝내 고려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전란이 끝나고 고려는 마침내 평화의 시대를 맞이한다. 강감찬은 이제 자신이 해야할을 다했다며 현종에게 사직을 청한다. 현종은 강감찬의 뜻을 존중하여 사직을 윤허하고 그동안의 고마움을 전하며 떠나는 뒷모습을 전송한다.
대전에 홀로 남겨진 현종은 그동안의 지나온 시간을 회상한다. 현종은 목종, 천추태후, 강조, 김훈, 최질, 김은부, 원정왕후 등 자신의 곁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떠나갔던 이들의 모습을 하나씩 스쳐 지나며 옥좌 위에 올라선다.
그리고 마지막 자막에서는 '왕실의 사통으로 태어난 사생아,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 즉위한 열여덟의 어린 황제, 하지만 왕순은 자신의 운명을 이겨내고 당대 최강 군사대국 거란의 침략을 격퇴하며 고려를 평화와 번영의 길로 인도했다'는 내용을 통하여 실제 현종의 업적을 조명했다.
이어 '고려의 중립적으로 실리적인 외교는 이후 150년간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시키는 지렛대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며 1031년 여요전쟁의 주역인 현종, 야율융서, 강감찬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을 끝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 KBS2 <고려 거란 전쟁> 관련 이미지. |
ⓒ KBS2 |
KBS가 50주년 특별기획으로 선보인 <고려거란전쟁>은, <태종 이방원> 이후 1년 6개월 만에 돌아온 정통사극이자, 임진왜란을 다룬 <징비록> 이후로 8년 만에 그려진 전쟁 대하사극으로 많은 시청자들의 기대를 받았다.
드라마는 초반부터 현종, 강감찬, 양규, 강조 등 각자 신념과 철학을 지닌 여러 인물군상들이 저마다의 위치와 관점에서 자신들의 신념을 구현하고 어떻게 국가를 지켜야할 것인지 고뇌하는 모습을 조명한다. 적국인 거란 역시 선악관점에서 극단적인 악역으로만 묘사하기보다는 거란이 당대의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민족적인 특성과 장점, 나름의 명분과 계산을 가지고 전쟁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냉철한 면모 등이 균형있게 묘사된다.
<고려거란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도 결국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반전(反轉)'의 메시지를 강하게 담아냈다. 드라마는 고려가 거란을 격퇴하는 호쾌한 무용담을 부각시키보다는,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내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외교적인 노력이나 고려내부의 복잡한 정치상황들도 비중있게 묘사했다.
하지만 양규의 최후와 2차 여요전쟁 파트와 종결된 16회를 분기점으로, 후반부의 <고려거란전쟁>은 180도 다른 드라마로 전락했다. 드라마는 2차와 3차 여요전쟁 사이 고려 내부의 상황을 다룬 전간기 파트에서 현종과 고려 호족세력의 갈등, 원정왕후의 흑화, 김훈-최질의 무신란 등 내부 권력다툼 이야기에 치중하면서 혹평을 들어야 했다.
시청자와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드라마의 문제점은, '지나친 역사왜곡과 주제의식의 실종'이었다. <고려거란전쟁>은 엄연히 정통대하사극을 표방한 작품이다.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야기의 개연성과 메시지를 설득력있게 풀어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제작진은 무리한 각색과 엉성한 연출로 균형감각을 잃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역사상 현종이 가장 사랑한 아내이자 모범적인 황후였던 원정왕후(이시아)는 현종을 배신하고 역모까지 감당하는 악녀로 왜곡됐다. 또한 고려 최고의 성군이던 현종은 개혁이라는 핑계로 개인적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거나 자신만의 아집에 갇혀 불필요한 분란을 초래하는 암군처럼 묘사됐다. 또다른 주인공인 강감찬의 활약상은 후반부로 갈수록 실제 역사보다도 활약상이 과도하게 늘어나면서 다른 신하들의 역할과 존재감은 갈수록 미미해졌다.
KBS는 논란이 커지자 설 연휴기간 동안 1주 휴방을 발표하며 수습에 나섰지만, 정작 재개된 이후에도 완성도에 대한 문제점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이는 향후 KBS표 대하사극의 인기 부활과 연속성에 있어서도 큰 걸림돌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좋은 역사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책임감보다 역사를 도구화시켜버린 작가 및 제작진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스카 로다주·엠마스톤 '패싱 논란', 봉준호 말이 떠올랐다
- '고려거란전쟁'이 강감찬을 제목에 내걸지 않은 진짜 이유
- 가상 아이돌의 음악방송 1위, 이게 가능하다고?
- '패스트 라이브즈'와 닮았다, 우습게 보다 큰코다칠 영화
- 호러 영화인 줄만 알았는데... 입시 문제·왕따 논란 담았다
- 휴대폰도, SNS도 있지만... 만날 수 없는 두 사람
- '스페이스 공감' PD "관객 덕에 버틴 20년, 섭외 1순위는 이소라"
- 도박하는 청소년들... "전교10등도, 자사고 학생도 빠져"
- 프로야구 유료 중계... 무료보다 못하면 어쩌라고?
- 시퍼렇게 날 선 칼 갈고 돌아온 대통령,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