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시절의 나도 그런 어른 곁에 있었다면...
[김선희 기자]
▲ 영화 <콜미바이유어네임> 포스터 |
ⓒ (주)디스테이션 |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통해 '성애에 대한 억압 문화 속에서 자연스러운 욕구의 발현 자체를 막연한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뒤엎어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각인했던 나의 어린 시절의 상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1980년대 이탈리아의 어느 별장을 배경으로 17세 소년 엘리오(티모시 샬라메)가 아버지의 연구를 돕기 위해 미국에서 온 24세 청년, 올리버(아미 해머)를 맞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엘리오 가족이 주로 식사와 대화를 나누는 앞마당은 초록의 나무와 수풀, 환한 햇살, 살랑이는 바람으로 여유롭고 평화롭게 그려졌다.
그곳을 시작으로 작은 풀장, 강가, 운동장 등 가족이나 이웃들과의 놀이 공간에서 엘리오와 올리버의 소통 방식만은 무언가 툭툭 끊기는 듯한 어색함과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때로 보는 이로 하여금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심지어 누군가들만이 아는 어떤 감정 코드에 내가 미처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낭패감이 들기도 했다. 어느 순간은 순한 호기심 보다는 오기에 가까운 집요함으로 견디듯 넘어 서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그만큼 내가 이 영화에 제대로 몰입했다는 반증이었다.
엘리오와 올리버 또한 자기 자신과 서로의 마음을 알기 어려워 외면, 회피, 단절, 소외감 등의 감정으로 얼룩져 있었던 것이다. '인물과 관객의 감정선이 이토록 생생하게 일치할 수 있다니...' 탁월한 계산력이 발휘된 영화적 표현력이라고 나는 느꼈다.
엘리오의 동선에서 자주 보이는 가족, 친구, 이웃 간 가벼운 포옹이나 볼 터치 등 다정한 일상적 신체 접촉이 내게는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살랑이는 바람처럼 환한 햇살처럼 사람과 사람간의 피부를 통한 감촉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비쳐진다. 그 속에서도 정겨운 환대와 뜨거운 성애 사이의 온도 차, 색깔 차가 섬세하면서도 명확하게 구분되어 드러난다. 상대적으로 성숙한 올리버와 처음 사랑을 나눌 때 수줍고 어색한, 그러면서도 자기의 속도에 집중하는 주도력을 보여준 엘리오의 리드미컬한 몸짓은 오래도록 내 기억 속 스크랩으로 길이 남게 될 것이다.
낯선 꽃 향기에 매료된 한 마리의 나비같이 다가서다 돌아 서다를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 거침없이 파고드는 티모시 샬라메의 연기가 가히 천재적이라고 느꼈다. 그가 자신의 상상력을 얼마나 섬세하게 다루고 과감하게 드러낼 수 있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양한 장면에서 고도의 이입으로 표현된 다면적 감정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저마다의 상당한 매력을 지닌 여러 인물들이 종종 일개의 배경으로 존재하듯 장악력을 발휘했다.
한편으로 엘리오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태도에 나는 내내 주목했다. 그들은 어쩌면 올리버를 만나기 전에 이미 엘리오의 성 정체성을 알아챘을지 모르겠다. 특히 어머니는 엘리오와 올리버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기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어머니에 비해 아버지는 엘리오를 대하는 태도가 여유롭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지인인 동성 커플의 방문을 앞두고 일방적으로 친화적 응대를 권고하는 등 가끔 엘리오를 통제하거나 자기 욕망의 수단으로 삼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올리버의 결혼 소식을 듣고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진 엘리오는 아버지 곁으로 가 고개를 파묻는다. 아버지는 엘리오가 겪은 사랑에 대한 환희와 아픔을 모두 예견한 듯 조금은 담담한, 그러나 깊은 슬픔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가만히 맞아준다. 아버지는 '그로 인한 모든 느낌을 간직할 것, 고통마저도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 그래야만 다시 다가올 사랑에도 줄 것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은 떨리는 음성으로 당부한다.
그 장면을 통해 아이와 성인의 경계에서 자기의 모든 감정을 존중하면서도 홀로 매몰되지 않도록 연결된 한 어른의 존재가 얼마나 큰 안도감을 주는 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엘리오와 같은 슬픔을 경험한 상처도 얼핏 엿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자기 불안을 별개로 다스리며 아들에게 만큼은 자신에게 없었을지 모르는 한 어른이 되어주려는 결기 어린 사랑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
영화의 마지막은 벽난로를 응시하며 붉어지는 눈가에 서서히 눈물이 맺혀가는 엘리오의 모습에 꽤 오래 머물렀다. 그러다 돌연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등 뒤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이야기를 멈춘다. 그로써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자기 아픔을 당당히 보일 수 있는 한 존재의 위엄 어린 성장'을 그려볼 수 있었다.
'소녀 시절의 나도 그런 어른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많은 아픔을 겪더라도 그것을 바탕으로 더 좋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텐데...'
영화를 통해 신체적 교감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을 친근하고 안전한 울타리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해 나가는 과정,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때 안길 수 있는 어른의 품이 있는 안전한 자유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덕분에 '다음 세대에게 어떤 어른이 되어주고 싶은지'에 대해 교육자로서의 나의 소망도 구체적으로 그려 갈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선희 시민기자의 개인 페이스북 계정으로 소개된 글의 일부를 편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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