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라이트]"덤덤한 북한 말 선생님 정서에 로기완 있었다"

이종길 2024. 3. 11.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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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영화 '로기완' 송중기
탈북자 멍든 삶, 자기 모습 투영해 표현
"어떤 혹독한 상황서도 자신 놓지 않을 사람"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종종 무국적자 혹은 난민으로 명명되었으며, 신분증 하나 없는 미등록자나 합법적인 절차 없이 유입된 불법체류자로 표현될 때도 있었다. 그는 또한 그 누구와도 현실적인 교신을 할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이기도 했고, 인생과 세계 앞에서 무엇 하나 보장되는 것이 없는 다른 땅에서 온 다른 부류의 사람, 곧 이방인이기도 했다."

조해진 작가의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 첫 구절이다. 마지막 희망을 안고 벨기에를 찾은 탈북자 로기완의 처지를 설명한다. 벨기에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국가에서 추방되거나 국가를 버리고 온 이들에게 좀처럼 난민 지위를 주지 않는다. 각종 지원금을 제공하며 정착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로기완은 인생의 전부를 걸고 모험한다. 자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북한을 함께 탈출했던 어머니는 중국에서 교통사고로 즉사했다. 로기완은 시신이 안치된 병원 근처도 가지 못했다. 탈북인에 대한 중국 당국의 대대적인 수색 기간이었다. 친척은 유럽으로 떠나라고 했다. 어머니 시신을 누군가에게 내주는 대가로 여비를 챙길 수 있다며 설득했다. 조해진 작가는 서술한다.

"로(기완)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얼마나 많은 순간을 뼈를 녹이는 듯한 후회와 고통으로 견뎌내야 할지. 후회는 주기적으로 반복될 것이고 고통은 점점 더 강도가 높아질 것이다. 한참을 달려왔다 믿어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순간의 선택에 대해 준엄한 질문을 던질 것이며, 로가 들여다보게 될 거울은 언제까지고 자기 모욕적인 언어로 얼룩져 있을 터이다."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고통이 배우 송중기의 얼굴로 구현됐다.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에서 갖가지 아픔에 멍든 삶을 보여준다. 배역을 알아가는 시도부터 난제였다. 지나온 시간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지 이해하는 과정이 끊임없이 수반돼야 했다. 어떤 잣대도 타인이 느끼는 상실의 무게는 잴 수 없다. 송중기는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용기를 냈다.

"누군가의 아픔보다 자기 손톱 밑에 박힌 가시를 더 신경 쓰는 게 사람인 듯해요. 로기완과 가까워지면서 주위를 더 돌아보게 됐죠. 그걸 습관화해도 온전한 파악은 어렵더군요. 그래서 북한 사투리 선생님을 찾아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어요. 대부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내용이었죠. 매번 슬픔이 밀려들었는데 선생님은 시종일관 덤덤했어요. 그 정서를 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거기에 로기완이 있을 것 같았죠."

그는 고통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삶 속으로 유입돼 깨어 있는 시간을 아프게 점령하는지 보여준다. 누구의 위로나 체온 없이 고통을 감내하는 얼굴도 병행해 나타낸다. 후자는 인정받지 못하는 슬픔이다. 정서적 고립감에 빠져 고통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송중기는 감정적 표현보다 일련의 흐름을 그렸다. 애써 끼워서 맞추기보다 주어진 구조에 자기 모습을 투영했다.

"제작사인 용필름의 임승용 대표가 저를 만나 로기완이 뜨거워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제 성격이 반영된 것 같다는 견해였어요. 정답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생각했던 로기완은 어떤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놓지 않을 사람이었어요. 실제로 제가 그래요.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실마리를 찾으려고 부단히 애쓰죠."

남다른 의지는 기어코 행복에 다가가는 이 영화에서 필수 불가결하다. 어떤 방식으로 상실과 마주하든 슬픔은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각자에게 맞는 대처 방식을 찾아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송중기로부터 가능성을 부여받은 로기완은 못지않은 상실을 경험한 마리(최성은)와 연대해 경험을 나눈다. 그것은 자기 위안에 그치지 않는다. 살아갈 힘과 실마리를 준다.

'힘들다'는 뜻의 일본어 단어 '쓰라이(つらい)'는 '동반자가 없다'는 뜻을 나타내는 '쓰라나시(つらなし)'가 어원이라고 한다. 원래 함께하는 사람이 없어서 괴로운 심경을 나타내는 말이었던 셈이다.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괴로움의 무게도 고난과 역경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연대하면 한결 가벼워질 수 있다. 송중기가 그린 의지의 역사는 바로 그걸 가리키고 있다. 슬픔은 언젠가 바뀔 것이고, 그 무게는 견딜 만하다며.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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