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 첫 수상·핑크 물들인 켄…오스카의 몇몇 순간

김예슬 2024. 3. 11.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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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현장 모습. EPA 연합뉴스

황금빛 일색이던 오스카가 진한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핫핑크 슈트를 빼입은 배우 라이언 고슬링이 ‘아임 저스트 캔’을 열창하며 벌어진 진풍경이다. 영화 ‘바비’(감독 그레타 거윅)를 함께한 마고 로비 옆에서 등장한 고슬링은 댄서들 위에 눕고 즉석에서 객석에 마이크를 넘기는 등 무대를 휘어잡았다. 10일(현지시각) 오후 미국 LA 할리우드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유쾌한 모습과 묵직한 울림을 주는 순간들이 넘쳐났다. 최고 영예인 작품상은 이변 없이 ‘오펜하이머’(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돌아갔다.

최초의 연속… 오스카까지 휩쓴 7관왕 ‘오펜하이머’

전 세계 영화제를 휩쓴 ‘오펜하이머’는 오스카에서도 최다 수상이라는 진기록을 이어갔다. 남우조연상을 시작으로 편집상, 촬영상, 음악상, 남우주연상, 감독상, 작품상을 받아 7관왕을 차지했다. 지난해 오스카를 휩쓴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동률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조연상), 킬리언 머피(주연상)와 놀란 감독은 이번이 첫 오스카 수상이다. 오스카와 연이 없던 놀란 감독은 “가능성을 봐줘서 고맙다”면서 “100년 역사를 가진 아카데미에서 수상해 기쁘다”는 소감을 남겼다. 킬리언 머피는 처음 후보로 오른 오스카에서 상을 가져갔다. 그는 그동안 놀란 감독 작품에서 조연으로 참여하다 ‘오펜하이머’로 첫 주연을 맡았다. “지난 20년 통틀어 가장 압도적”이라고 운 뗀 그는 “우리는 폭탄을 만든 그 사람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앞으로 세상이 평화로워지길 바란다”고 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다사다난하던 유년기와 개인사를 우회적으로 언급하며 “우리가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건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왼쪽)에게 작품상을 건네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EPA 연합뉴스
수상의 기쁨을 누리는 배우들. EPA 연합뉴스

고배 마신 ‘패스트 라이브즈’… ‘바비’는 노래로 주목

한국영화는 올해 오스카에 별다른 후보를 내지 못했다. 다만 한국계 감독과 배우들이 함께한 ‘패스트 라이브즈’가 각본상과 작품상 후보로 이름 올려 기대를 모았다. 다만 ‘추락의 해부’(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오펜하이머’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지난해 ‘오펜하이머’와 함께 북미 흥행의 쌍두마차로 꼽힌 ‘바비’는 노래로 주목받았다. 빌리 아일리시와 피니즈 오코넬 남매가 ‘왓 워즈 아이 메이드 포?’(What was I made for?)로 주제가상을 받은 데 이어 영화에서 켄을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이 객석과 무대를 핫핑크로 물들이는 장관을 연출했다. 수상을 위해 무대에 오른 엠마 스톤이 “켄의 공연을 보다 드레스가 찢어졌다”고 했을 정도다. ‘가여운 것들’은 후보로 올랐던 11개 부문 중 4개 부문에서 수상 낭보를 전했다. 엠마 스톤은 골든글로브에 이어 오스카에서도 여우주연상의 기쁨을 누렸다. 시상식 중계를 맡은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시상으로도 균형을 잘 잡은 품위 있던 시상식”이라고 총평했다.

나체로 등장한 배우 존 시나. EPA 연합뉴스
현장 주위에선 전쟁 반대 시위가 함께 열렸다. AP 연합뉴스

나체 시상에 뼈 있는 농담까지…오스카의 몇몇 순간

의상상을 시상한 프로레슬러 겸 배우 존 시나는 주요 부위만 가리고 무대에 올라 현장을 경악과 웃음으로 물들였다. 1974년 제46회 아카데미 시상식 당시 신원 미상 남성이 나체로 무대 위에 난입한 것을 풍자한 퍼포먼스다. 이후 그는 황금색 천을 두르고 재등장해 시상을 무사히 이어갔다. 소신 발언도 있었다. 진행을 맡은 방송인 지미 카멜은 ‘바비’를 연출한 거윅 감독이 감독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걸 언급하며 “손뼉을 치고 있어도 그에게 투표 않은 건 여러분”이라고 꼬집었다. 앞서 후보 발표 당시 ‘바비’가 작품상 후보에 올랐음에도 거윅 감독이 감독상 후보에 들지 못해 성차별 논란이 일던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높았다. 이날 시상식 현장 부근에서 가자지구 전쟁 중단을 촉구하는 시위가 동시에 열리기도 했다. 학살 중 시상식이 열리는 게 옳지 못하다는 피켓 역시 눈에 띄었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국제영화상을 받은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지금 우린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분쟁으로 이끈 점령과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를 반대하는 사람들로서 이 자리에 왔다”면서 “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 우리를 돌아보고 직면하기 위한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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