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서 “규격 외 천재라면 키워보고 싶다” [쿠키인터뷰]

이영재 2024. 3. 1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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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9단 상하이 대첩 넘어 ‘상하이 전설’ 쓴 신진서
한국 바둑, 전례 찾아보기 어려운 위기 속에 영웅 등장
“바둑 보급, 후계자 양성 등 다방면에서 기여하고 싶다”
22~25회 농심배 우승을 홀로 결정지은 신진서 9단이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신 9단은 4년 연속 농심배 수문장 역할을 하는 동안 16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함께 작성했다. 사진=박효상 기자

현존 세계 최강 바둑 기사 신진서 9단이 자신의 뒤를 이어 한국 바둑을 책임질 후계자 양성 의지를 드러냈다. 다만 “규격 외 천재라면 키워보고 싶다”는 전제가 달렸다.

신진서 9단은 지난달 중국 상하이에서 막을 내린 제25회 농심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혼자 힘으로 한국 우승을 결정하는 ‘싹쓸이 6연승’ 역사를 썼다. 이는 이창호 9단이 ‘상하이 대첩’ 당시 기록했던 5연승보다 1승 더 많은 성과로, ‘상하이 전설’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신 9단이 한국에 우승트로피를 안긴 6승에는 중국 랭킹 1~3위 구쯔하오⋅커제⋅딩하오 9단을 비롯해 이번 대회에서 7연승을 달린 메이저 세계 대회 우승자 셰얼하오 9단, 최근 기세가 좋았던 자오천위 9단 등 중국 대표선수 5명 전원이 포함된다.

여기에 일본 최강의 기사 이야마 유타 9단이 더해지는데, 신 9단은 2012년 프로 데뷔 이후 12년 동안 일본 기사와 세계 무대에서 41번 맞붙어 단 한 판도 패하지 않고 승리하면서 41연승 행진도 이어나갔다. 이는 이창호⋅이세돌 9단은 물론, 중국 커제 9단 등 어떤 기사도 달성하지 못했던 기록으로, 온라인 상에선 신 9단이 ‘전생에 이순신 장군’이었던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이번 농심배에서 한국은 대회 초반 단 한 판의 승리도 없이 출전 선수 4명 전원이 ‘단칼 신세’로 전락했다. 일본은 주장 이야마 9단이 남고 중국은 5명 전원이 생존한 ‘1대 6’ 상황에서 홀로 출사표를 올린 신 9단은 이번 대회 우승으로 통쾌한 성과를 하나 더 남겼다. 중국에는 다소 치욕적인 기록인데, 농심배 사상 최초로 한 명의 기사가 한 국가 선수 전원을 탈락시킨 것이다.

중국 바둑계는 최정예 기사 5명이 신진서 단 한 명에게 모두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면서 패배하는 상황을 목도한 이후 한탄 보다는 경외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중국 상하이 현지에선 한국 우승이 확정됐던 대회 마지막 날, 신진서 9단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몰려든 팬들로 대국장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국적을 뛰어넘어 압도적인 일인자의 등장에 보내는 찬사였다.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연일 대국을 치르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신진서 9단은 지난 6일 쿠키뉴스와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한국기원에서 만나 소회를 밝혔다.

구쯔하오 9단과 농심배 최종전을 복기하면서 인터뷰를 진행한 신진서 9단. 사진=박효상 기자

  
한국 바둑 위기…이전과 다른 스타일의 일인자 신진서

신진서 9단은 이전 일인자 이창호⋅이세돌 9단과는 다른 면모가 있다. 대한민국 ‘바둑 국보’ 이창호 9단은 1975년생으로, 16세 6개월 무렵이던 1992년 동양증권배(對 린하이펑 9단, 3-2) 정상에 오르면서 세계 최강의 기사로 발돋움했다.

1991년부터 2009년까지 바둑대상에서 도합 11회 MVP를 수상한 이창호 9단은 세계대회 그랜드슬램(동양증권배, LG배, 삼성화재배, 후지쓰배, 응씨배, 춘란배, 도요타덴소배)을 비롯해 통산 140회 우승을 달성한 바 있다. 이세돌 9단 역시 3단 시절이던 2002년 후지쓰배 우승을 차지한 이후 메이저 세계대회에서만 14회 정상에 올랐다. 

기록 면에서 보면, 아직 신 9단은 ‘양이(兩李)’로 불리는 이창호⋅이세돌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진서가 최강자로서 카리스마를 내뿜는 이유는 바로 압도적인 ‘기량’에 있다. 신 9단 앞에서는 중국 최강자 커제 9단마저도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완패하는 경우가 많다.

이창호 9단은 ‘돌부처’, ‘신산’ 등으로 불리며 특유의 포커페이스와 계산력으로 후반 역전에 능했다. 아무리 불리한 바둑도 이창호 9단이 추격하고 있다면 승부는 끝나지 않은 것이었고, 종국에는 늘 ‘반집’으로 역전승을 거두는 짜릿한 명장면도 종종 연출했다.

이세돌 9단도 비슷하다. 초반만 조금 더 강했더라면 이세돌 9단의 적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바둑계에서 종종 회자되는 이야기인데, 자유분방하고 변화무쌍한 기풍으로 초반 모험을 종종 시도했던 이세돌 9단은 다소 불리한 상태에서 중반전을 시작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중반 전투가 시작되면 ‘전투 12단’ 위명에 걸맞는 폭발적인 수읽기로 일거에 상대의 허를 찌르면서 승기를 가져왔다. 이창호 9단 못지 않게, 이세돌 9단 또한 역전승이 많았다.

하지만 신진서 9단이 승리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신 9단은 상대에게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고 완승을 거두는 기보가 많다. 결승전에서도 최종국까지 가서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던 ‘양이(이창호⋅이세돌)’와 달리, 번기 승부에서 한 판도 내주지 않고 승리하는 완봉승이 대다수다.

이번 농심배 6연승 싹쓸이 과정에서도, 스스로도 긴장됐다고 밝힌 최종국(對 구쯔하오)을 제외하면 5연승을 거두는 동안 단 한 차례의 위기도 없었다. 인공지능 등장 이후 프로기사들은 적나라한 수치 공개를 당하게 되는데(한 수 한 수 착수할 때마다 AI가 승률 그래프를 나타낸다), 신 9단의 수법들은 사실상 인공지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 ‘신공지능’이라는 별명도 명불허전으로 위명을 떨쳤다.

자타공인 세계 바둑 최강자 신진서 9단. 농심배에서 ‘상하이 전설’을 쓴 이후에는 중국 바둑 팬들의 빗발치는 사인 요구에 모두 응하는 모습도 보였다. 사진=박효상 기자

단체전 최강자 신진서, “책임감이 원천”

“기량적인 측면에서는 중국 강자들과 여전히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겸손하게 운을 뗀 신 9단은 “예컨대 셰얼하오 9단에겐 이번 농심배에서 이겼지만 삼성화재배에선 졌고 구쯔하오 9단에게도 이길 때가 더 많긴 하지만 제일 중요한 승부였던 란커배에서 지기도 했다”고 돌아봤다.

신 9단은 “지난해에 개인전에서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단체전은 거의 다 우승했다”면서 “농심신라면배⋅바둑리그는 물론, 아시안게임까지 단체전 중요한 승부에서 진 기억은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경솔한 수가 나오는 것이 고쳐야 할 단점인데, 책임감이 있다면 이런 실수가 덜 나오는 것 같다”며 웃었다. 신 9단은 “개인전은 이기든 지든 제 한 명 몫이니까 기분에 따라 움직일 수가 있는데, 단체전은 그렇지 않다”면서 “팀전이라는 책임감이 오히려 무게를 잘 잡아주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신 9단은 지난해 바둑리그 소속팀(Kixx)을 사실상 혼자 힘으로 정상에 올렸고, 아시안게임에서도 개인전 패배 이후에도 흔들리지 않고 단체전에서 중심을 잡으면서 대한민국에 금메달을 안기는 성숙한 모습도 보였다.

또한 전설이 된 이번 농심배 최종국에선 과거와 달라진 면모도 하나 보였는데, 그것은 바로 실수 후 대처였다. 란커배에서 구쯔하오 9단에게 패해 우승을 헌납할 때, 신 9단은 경솔한 실수 이후에 급격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신 9단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란커배 결승에서 실수 이후에도 5대 5 형세였다는 사실보다, 그 상황에서 바둑을 놓아버렸다는 점이 제일 아쉬웠다”고 돌아봤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최선을 다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데 그러지 못했다. 5대 5가 아니라 2대 8이나 1대 9 상황도 충분히 역전이 가능하고, 그게 인간 바둑의 묘미이자 프로 정신”이라고 짚은 신 9단은 농심배에선 이것을 그대로 실천했다.

구쯔하오 9단에게 역전을 당한 이후, 자책하기보다 곧바로 마음을 다잡고 추격전을 전개한 끝에 ‘패’를 통해 재역전에 성공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신 9단은 “당시 인공지능 그래프만 놓고 본다면 98%에서 5%로 추락한 것이니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승부를 놓지만 않는다면 기회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신진서 9단. 사진=박효상 기자

바둑계 발전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기여하겠다

신진서 9단은 바둑 보급은 물론 후계자 양성에도 관심을 드러냈다. “규격 외 천재라면 키워보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낸 신 9단은 “그런 친구가 만약 있다면 저보다는 AI를 닮고 싶어할 것 같긴 하다”며 웃었다.

신 9단은 “지금은 AI의 수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면서 “현재 저는 승부 최일선에 있고, 매일 AI를 보고 또 AI와 싸우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내용을 풀어낼 수 있고 제 방식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사실, 바로 이와 같은 ‘AI 이해도’가 신 9단의 최고 장점으로도 꼽힌다. AI는 바둑 실력과 비례해서, 즉 기량이 강하면 강할 수록 그 효과를 크게 보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이다.

다만 신 9단은 “후계를 양성하는 것은 한참 후가 될 텐데, 그때도 AI를 설명하는 일이 가능할지는 모르는 일”이라며 “만약 지금 당장 어떤 천재 기사를 키운다고 생각하면 자신 있지만,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는 글쎄…”라고 여운을 남겼다. 그러고 보면, ‘바둑 황제’ 조훈현 9단이 내제자 이창호 9단을 키운 시점 역시 최전성기 시절이었고, 조 9단이 1989년 초대 응씨배 우승 직후 주변에 “이제 창호가 알아서 해주겠지”라고 했던 말은 유명하다.

신 9단은 “바둑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팬 분들에게 봐 달라고만 하는 게 아니라, 제가 먼저 앞장 서서 바둑의 재미를 보여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며 “앞으로도 좋은 기보를 많이 남기고, 특히 바둑 팬 분들에게 재밌는 바둑 보여드리면서 이번 농심배처럼 기쁨도 드릴 수 있는 기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전했다.

신 9단은 “제가 용띠인데, 올해 청룡의 해를 맞아 용처럼 훨훨 날아보도록 하겠다”면서 “많은 관심 보내주시면 힘이 나니까요(웃음). “관심과 응원 보내주시면 좋겠다”고 말하며 인터뷰를 갈무리했다.

농심배에서 4년 연속 한국 우승을 책임진 신진서 9단. 사진=박효상 기자


이영재 기자 youngja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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