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회] 어서 오세요, 모호한 체제 전환의 틈새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2024. 3. 1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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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하는 세상으로, 체제전환 3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대담 사회 : 박기형 선전위원장
대담 참여 : 김찬, 남영란, 유형섭, 조건희
정리 : 이숙견, 메밀

아직 춥던 지난 2월 초, 서울시 동작구에서 체제전환운동포럼(포럼)이 열렸다. 포럼은 주거, 교육, 농업, 젠더, 에너지, 노동, 반전 평화의 일곱 가지 가로지르길 세션과, "자본주의를 질문하기" 종합 세션으로 구성되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자료집을 끼고 조붓하게 붙어 사흘을 내리 앉아있다 들뜬 가슴으로 헤어진 동지들이, 보름 후인 2월 19일 아침, 모니터 너머로 다시 만났다. 3월 23일 체제전환 정치대회를 앞두고, 각자에게 남겨진 기대와 고민, 과제와 실마리를 나눠보았다.

기형 : "안녕하세요. 포럼에 참여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이하 한노보연) 회원들을 모시고, 우리가 생각하는 체제전환의 상을 함께 이야기 나누고 그려보고자 합니다. 포럼 소회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해 대회에 대한 바람과 더불어, 체제전환 운동에 거는 각자의 기대와 고민도 말씀 부탁드려요."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 조직위원으로서, 포럼을 가로지르며 든 고민

건희 : "노동자 건강권 운동을 확장하려면 조직된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노동과정을 통제해 나가고, 자본과 맞서 싸우는 투쟁의 구체적 과정들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다양한 운동이 제기하는 문제들, 예를 들면 장애운동이 말하는 몸의 정상성과 비정상성, 일률적인 속도에 관한 이야기를 제기할 수 있고, 그렇게 운동과 운동이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노보연이 아직은 주도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있는 여러 동지들, 이를테면 여성운동, 장애운동, 주거운동 등 동지들과 함께 해방의 전망을 그려나가고 싶어서 조직위원으로 함께 하고 있어요."

영란 : "제가 조직위원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도 '지역'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어요. '체제전환'이라는 말, 속 시원하잖아요. 한편으로는 참 모호하고요. 이 온도 차는 '과연 체제전환 운동이 대안 체제로써의 상을 가지고 있냐'는 의구심을 낳고, 그런 의구심과 반문이 지역으로 내려올수록 더 심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거든요. 지역의 경우, 특히 시구군의 기초지자체 단위로 갈수록 '체제전환'이 들어갈 틈이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다른 세상, 다른 삶, 다른 일터를 꿈꾸는 이들이 지역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만나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고요."

형섭 : "각각의 이슈를 해결해 가는 것만으로는 구조적으로 얽혀있는 근원적 문제에 가닿지 못하는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는 고민이 있었고, 무언가 큰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늘 있었어요. 이번 포럼에서 좋았던 건 좋은 사례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체제전환이 이상적이고 추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는데, 다른 나라들에서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으로 나아가는 과정들이나 항만 노동자들이 물류를 막음으로써 평화운동에 일조하는 등의 다양한 예시들이 긍정적으로 와 닿았어요."

찬 : "저는 부산에서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고 있는데 운동의 주체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청소년들은 노동이나 젠더, 가족 등의 다양한 요인으로 생활의 형태가 다양하고 파편화되어 있는데 '학생 청소년'만 상정하고 활동하다 보니 이 운동의 주체가 협소해져 온 거죠. 그래서 청소년들을 현장에서 만나고 우리 사회의 주체로 세워내려면 다른 사회운동과 청소년 운동 사이의 접속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운동의 희망이 있을 것 같았고요. 한편으로는 현장성이 떨어지고 있는 지금의 청소년 운동 현실에서 다른 사회운동과의 접속이 절실하기도 했고요. 그중에서도 노동과의 접속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조직위원으로 함께 하게 되었어요. 그렇다 보니 노동 세션에서 '모든 사회운동이 노동에 접속해야 한다'라는 말이 가장 인상 깊었어요. 청소년들이 자기 삶과 몸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지 못한 문제를 제기하며 학습이나 입시에서의 작업중지권을 어떻게 의제화시킬 수 있을지도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영란 : "지난 포럼에서도 중요하게 제기하기는 했는데, 이 지역 운동의 재구축이라는 과제에 대해 한 가지 답을 내리기는 좀 어려운 것 같아요. 일단 부산지역 이야기부터 좀 해보자면 부산은 5인 미만, 50인 미만 사업장 비율이 압도적인 곳이잖아요. 이런 곳에서 노동자 건강권과 생명·안전의 이슈를 어떻게 확장해 갈 것인지가 가장 큰 고민인 것 같아요. 저는 '지역'이라는 지평을 확장해야 이 문제가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지역에서 이러한 각각의 존재들, 그리고 각각의 현장들이 일상적으로 어떻게 만나면서 건강권의 지평을 열 수 있을지 고민이에요.

체제전환이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다양한 활동들이 벌어지는 곳이 지역이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기존에 해왔던 수많은 연대와는 다른 움직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저는 이후에 어떤 형태가 되건 체제전환 운동은 개인들의 연합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개인들을 묶는 가장 기초 단위가 지역이 되고, 그렇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형태의 연합질서를 구상해 봅니다. 이번 3월의 정치대회에서 각 지역에서 정치대회를 열기로 함께 선포하면 좋겠고, 그런 구체적 상과 전략을 고민했으면 합니다."
 
 2024년 2월 1~3일 서울에서 체제전환운동포럼이 열렸다.
ⓒ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 조직위원회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 그리고 이후

형섭 : "포럼에서는 각자의 고민을 나누고 그 고민을 통해 사회운동 공동의 주체임을 서로 확인하고 연결되는 감각을 일깨웠다면, 정치대회에서는 이제 방향과 전략을 할 수 있는 한 구체적으로 모아내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찬 : "앞으로의 상이 좀 모호해요. 왜 모호할까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아직 해보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체제전환의 상을 그려나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리가 지금 수준에서 해야 할 것은 결국 더 잘 뭉치고 고민을 더 잘 나누고 조직화를 좀 더 열심히 하며 자기 현장을 더 발굴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란 : "저는 '앞으로의 상이 모호하다'라거나 '포럼이 뚜렷한 상을 보여주지 못했다'라거나 '그러니까 정치대회도 그럴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간 만들어왔던 것과는 다른 운동으로 전환하려면 지금까지 우리 운동이 어떻게 걸어왔는지가 서로의 눈에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서로의 운동이 어떻게 걸어왔는지, 체제의 어떤 부분에 파열구를 내는 방식으로 운동을 벌여왔는지, 혹은 그렇지 못했는지, 어느 지점에서 왜 실패했고 어느 지점에서 서로를 연결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거든요. 저는 우리가 모호함을 느끼고 이 모호함을 걷어내기 위해 자꾸만 만나는 과정에서 이런 것들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건희 : "체제가 전환된 이후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일하고 있을지, 하루 중 얼마나 일터에서 머무르게 될지, 돌봄 노동은 어떤 방식으로 하게 될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을지를 함께 상상해 보고 싶어요. 사실상 자본가들과 우리가 동등하게 공유하고 있는 단 한 가지의 절댓값이 있다면 시간이잖아요. 열린 조직을 선언한 한노보연이 다양한 몸을 지닌 더 많은 회원과 더욱 다양한 현장들, 다양한 단체와 정당들과 만나가며 교차성의 언어로 더 많은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열린 조직의 한 전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형섭 : "사실 일반적으로 '정치'하면 떠오르는 건 제도권 정치잖아요. 거대 양당의 정치, 누굴 총선 지역구에 넣네 마네하는 정치, 통합하느니 마느니 하는 정치요. 그런 식이 아니라, 더 많은 주체들을 포괄하고 포섭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체제전환도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더 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서 인식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지금까지의 운동이 반성할 부분을 정치대회에서 짚는 것도 유의미할 것 같아요. 관성적으로 진행했던 노동운동이라든가 사회운동이 생각보다 신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측면이 있었으니까요. 소위 '노동자대회'를 가보면 특히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만의 대회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어요. 그런 자리가 우리 사회 다양한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더 주목받기도 하고 어울리기도 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는 장소가 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건희 : "어느 토론회에서 인상 깊게 들은 말인데요.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지 않고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외치고 있다는 지적이었어요. '만국의 노동자'가 아닌 '110만 민주노총 조합원'이라 위시하는 구호들이 누구를 포괄하지 못하고 있고 어떤 전망을 놓치고 있는지, 무엇과 타협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그렇고요."

영란 : "체제를 바꾸는 일에는 우리가 기존에 제기하던 담론이 얼마나 작은 영역에서 제기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담론을 지역의 활동가들이 자기 영역의 운동과 교차시키는 작업을 통해 우리의 일터와 삶터를 바꿀 가능성, 즉 체제전환 정치가 거기서부터 만들어진다고 믿어요. 그런 가능성을 지역에서 끊임없이 제기해 갈 동력의 시작이 정치대회였으면 좋겠고요. 어디서 '뿅' 하고 체제전환에 대한 멋진 답을 내놓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부터 정치의 주체로 서서 크든 작든 나의 활동들을 전개할 수 있겠구나' 하는 가능성만 보여줄 수 있다면, 저는 체제전환 운동 정치대회는 성공한 거라고 생각해요."

기형 : "네, 그럼 우리 모두 3월 23일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에서 만나기로 하고요, 못다한 말들은 그때 더 나누면 좋겠습니다. 일터 독자님들, 한노보연 회원님들도 함께해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노동자가 만드는 일터> 3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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