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건강권 운동을 체제전환운동으로
[최민]
2023년 여름 윤석열퇴진운동본부가 제안되었을 때, 반노동 정책, 한반도 전쟁위기, 민생 외면, 여성/성평등/젠더 지우기 등 윤석열 정부가 '퇴진'해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치는데도 퇴진 운동에 적극 함께 하면서 운동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이 기꺼이 일지가 않았다. 아마도 박근혜를 퇴진시켰던 경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시민들의 힘으로 '정권 퇴진'을 이루더라도, 두 개의 기득권 정당 중 다른 한 쪽의 집권으로 이어진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한 발자국도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운 것이다.
이것이 '찍을 사람 없다'며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는 다수 시민의 마음이 아닐까? 이제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려보려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노동자의 몸이 중심인 일터, 노동자가 통제하는 현장 만들기 등 노동안전보건운동으로 세워온 그 가치를 그와 맞닿아 있는 체제전환운동으로 분명히 하려 한다. 우리의 운동으로 '반보수전선'과 정권 교체 약속 대신, 지금의 이 체제를 바꾸고 넘어서자는 이야기를 해야 할 때다.
체제전환의 과제를 던져온 노동자 건강권 운동
사실 한국의 노동자건강권 운동은 오래 전부터 변혁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운동을 지향해왔다. 창원 대우중공업 국민차 사업부에서 일하던 이상관 노동자는 1999년 2월 35kg이나 되는 기구를 옮기다 허리를 다쳐 추간판탈출증을 진단받았다. 두 달 후 여전히 무릎과 골반 등 통증이 심해 걷기도 힘든 상태였는데, 통원 치료로 강제 전환되게 된다. 병원 오는 날 외에는 휴업급여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일상생활조차 어려울 정도로 통증에 시달리던 중 1999년 6월 22일 육체적 고통과 가족들에게 미안함을 유서로 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9년 7월 7일 산재추방과 노동자 건강권 사수를 위한 마창지역 공대위의 근로복지공단창원지사 항의집회를 시작으로 사건이 알려지고 나서,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한 155일간의 전국적 투쟁이 이어졌다1).
당시 투쟁에 연대하던 '산재 운동 단체들' 사이에서 여러 차이가 드러났다. 한 흐름은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산재로 승인받기는 어렵고 요양 관리상 꼭 집어 문제 삼을 내용을 찾기도 어려우니, 의학적 법률적 전문가들이 나서 교섭을 통해 성과를 얻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흐름은 산재보상제도 문제점과 침체된 노동자 건강권 문제를 부각시키고 동력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으로, 산재 노동자의 자살이 구조적 타살임을 드러내는 투쟁을 하고 그 성과로 제도 개선이나 유족 보상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2)
후자 쪽의 입장을 가졌던 활동가들 중 일부가, 전문가주의에 기울어 안전보건문제를 기술적이고 부문적인 과제로 상정하는 운동과 결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3). 이들은 이후 "근골격계직업병연구단"을 거쳐 2003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아래 '한노보연')를 창립한다.
▲ 한노보연은 체제전환 정치대회에 참여하고, 이후 체제전환운동의 연합을 함께 만들어가려는 고민을 하고 있다. 사진은 2월 1~3일 열린 체제전환운동 포럼. |
ⓒ 체제전환운동정치대회 조직위원회 |
달라진 일의 세계에서 일하는 사람의 건강을 얘기하는 것
한노보연은 지난 2023년 20주년 선언문에서 노동과정, 생산/재생산의 지점에서 '노동자의 몸과 마음의 건강'이라는 가치에 기반해 '노동자들의 분절'을 넘어서 함께 할 수 있는 투쟁과 경험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밝혔다. 그것이 한노보연이 생각하는 노동자 건강권 운동의 체제전환운동으로서의 가능성이자 과제다.
우리는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산업 전환에 따른 고용 문제 해결만 요구하거나, 폭염 등 기후재난에 대한 대비라는 수세적 대응을 넘어, 자본이 독점한 생산에 대한 권리와 통제를 노동자가 손에 쥐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노동이 조직돼 온 방식이 기후위기와 노동자 위험의 원인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이를 끊어내기 위한 과제로 작업중지권을 요구하고, 노동의 속도와 시간에 대한 문제 제기를 조직한다. 이를 위해 폭염으로 인한 건강 문제를 제기하는 건설노동자, 라이더 노동자, 물류센터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있다.
만연한 성폭력과 성차별에 맞선 미투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터에서의 성폭력, 성차별에 따른 건강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젠더 차별적으로 구성된 일터 자체와 몰성적인 '노동자 건강' 담론이 일하는 사람 모두를 어떻게 불건강하게 만들어 왔는지 드러내고, '노동자 건강'을 새로 정의해 나가려고 한다.
'일하는 사람'의 다양한 정체성을 연결하여 체제의 문제를 함께 제기하고자 하는 이런 실천이 지금 시대에 '계급'을 새로이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노동자 건강권을 매개로 조직하고 엮어가는 것이 노동자 건강권 운동의 과제다.
노동안전 제도화와 산재 범죄화의 성과를 넘어
노동안전보건운동 역시 20여 년 전에 비하면 상당히 제도화, 안정화되었다. 한국 사회의 경제적 수준이나 형식적 민주화 수준이 높아진데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거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의 사망 사고와 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거치면서, 산재 사망 문제, 노동자 건강권 이슈가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 떠올랐다.
촛불 정권을 자임하던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이를 적극 자신들의 책무로 받아 안겠다고 나서면서, 다양한 문제 제기와 정책 제안의 통로가 열렸다.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 중대재해처벌법 제정까지, 노동자 건강권 운동에도 정책과 관련한 역할 요구가 높아졌다. 여론 형성, 정당/혹은 국회의원과의 협업을 통한 정책 생산과 제도 개선, '자문' 혹은 연구의 형태로 정부 정책 개입 등이 주요한 활동 형식이 되었다.
이는 노동운동과 노동안전보건운동의 성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회운동으로서의 노동안전보건운동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노동안전보건 이슈의 '정치적' 성격이 약화하고 '정책적' 접근이 강화됐다. 문제를 형성하는 역동적 과정 자체의 중요성은 감소하고, '문제 해결'이라는 결과가 중요시된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운동을 통한 주체 형성의 가능성은 감소하고 대리주의가 강화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노동조합의 사회운동적 성격의 약화와 더불어 서로 상승효과를 낼 수도 있다.
제도화가 체제 내화와 같은 말은 아니다. 사회적 주체로 자격을 획득, 유지, 확립하는 과정을 제도화라 할 때, 운동의 목표와 가치를 말하는 주체이자 세력으로서 인정받고, 이를 통해 정책적 성과를 얻어내는 것은 분명 운동의 성과다. 다만 이 제도화가 사회운동과 함께 성장하는 과정인지, 사회운동 강화와는 별도로 국가를 유지, 관리하는 데 활용되는 과정에 불과한지 늘 경계할 필요는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이후, 노동자 건강권 문제를 사법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와 긴장도 있다. 박상은은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통해 산재를 '범죄화'하는 패러다임이 성공하게 된 조건을 사회운동과 정부 양 측면에서 찾는다. 산재 범죄화 패러다임은, 노동자 현장 권력 강화 등 다른 대안은 상대적으로 진전이 어려운 상황에서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제한적인 선택지였다. 동시에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형사처벌은 강력하게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부에서도 논리적으로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안이기도 했다는 것이다.4)
물론 안전보건영역에서 범죄화는, 노동자의 산재사망이 범죄로 취급받지 못했던 관례에 문제제기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법 제정 과정에서 사회적 의제가 되었던 위험의 외주화 금지, 작업중지권 강화 등의 과제가 약화되고, 법 제정 이후 법 적용과 형량 중심의 논의가 강화되었다는 점도 분명하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큰 성과로 기억하면서도, 이런 긴장을 인식하고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체제전환 사회운동의 연합에 함께하는 노동자건강권 운동
이런 고민과 시도, 노력을 각각의 사회단체들이 홀로 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한노보연은 체제전환 정치대회에 참여하고, 이후 체제전환운동의 연합을 함께 만들어가려는 고민을 하고 있다. 체제전환운동의 주체가 되려는 여러 사회운동과 함께, 체제전환이라는 큰 목표와 이 체제 안에서의 일상 활동 사이의 경쾌한 긴장감을 만들어 가길 기대한다.
변혁이라는 이름으로 체제전환의 문제의식을 품고 있었던 노동자 건강권 운동의 역사를 이어가며, '일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기준으로 다양한 운동들에 함께 하고, 노동자 건강권을 매개로 더 많은 주체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더 많은 노동자 건강권 운동의 활동가, 주체들이 우리의 도전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3월 23일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에서 만나자.
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열사정보, 이상관-당시 27세.
2) 이상관공대위 투쟁 평가 토론회 자료집, 2000.3.1
3) 유경순, 『사회변혁을 꿈꾼 노동안전보건 활동가 이훈구』, 2023
4) 박상은, 근간. 『산재 사망의 관례화에서 범죄화로 :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운동의 성과와 한계』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노동자가 만드는 일터> 3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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