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를 '보수의 심장'이라 하면, 갈 방향이 없어져"

이명은 2024. 3. 1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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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대구·경북 대안언론을 만들고 20년간 이어온 유지웅 대표이사·기자

[이명은 기자]

대안언론 <평화뉴스>가 창간 20주년을 맞이했다. 창간 후 쭉 편집장을 맡아온 유지웅 기자는 얼마 전 편집장 자리를 후배에게 넘겼지만 여전히 대표이사와 기자를 맡고 있다. 필자가 유지웅 기자를 처음 알게 된 건 해당 매체 독자위원회 참여를 제안받으면서였다.

<평화뉴스>는 한달에 한 번 독자위원회 회의를 열어 자사 기사에 대한 독자의 의견을 청취한다. 독자위원회 자료에는 그간의 기사 내용과 더불어 독자위원회를 7년 넘게 이어가고 있는 이유를 추정할 단서가 있었다. '독자보다 뛰어난 기자는 없다'.

'겸손'은 <평화뉴스>를 창간한 유지웅 기자 개인의 자세이기도 하지만, 언론사 자체의 기조이기도 했다. 대안언론을 꿈꾸며 인터넷언론을 창간하고 20주년을 맞이하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이 궁금했다.
 
 평화뉴스 사무실에서 만난 유지웅 기자, 언론사의 세월이 느껴지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 생명평화아시아 이명은
    
- 2004년에 <평화뉴스>가 갑자기 생기진 않았을 것 같아요. 어떤 배경이 있었나요?

"제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가 96년 2월인데, 그해 봄에 대구 평화방송이라는 게 처음 생겼어요. 제가 종교도 가톨릭이고 해서 거기에 입사했죠. 정확하게 7년 반, 그러니까 8년 정도 일을 하고 2003년 가을에 그만두었는데, 제가 방송국에 있을 때 지역에 있는 다른 기자들하고 공부를 했어요.

그러니까 서로가 신뢰할 만한 좋은 기자들끼리 모여서 거의 격주로 스터디하고 토론하고 기사 가지고 품평도 하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때만 해도 언론개혁운동이 컸었고요. 그러다가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나고 우리 기자들 또래는 자괴감, 반성 이런 게 2003년에 있었죠. 그러면서 대안언론이 필요하다 생각하던 찰나에 그냥 제가 방송국을 그만두고 평화뉴스를 하게 됐죠.

기자들 잘못으로 참사가 일어난 건 아니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언론 행태나 또 지역사회에 대한 고민들이 좀 많아졌죠. 언론을 비판할 수도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방법으로 인터넷 신문사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기사의 질로서 언론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을 만들 수 있느냐 그게 저한테는 제일 걱정이 컸죠. 전국에서 우후죽순 인터넷 언론이 생기니, 막상 보면 기사의 수준이나 기본이 안 된 게 참 많았었어요."

- <평화뉴스>가 추구하는 가치가 평화와 통일, 섬김 나눔, 지역 공동체네요. 보통 신문사와는 다른 것 같은데요?

"주로 타 언론은 정론직필이라든가 진실의 붓이라든가 이런 걸 많이 하죠. 평화뉴스를 한마디로 하면 가치를 찾는 언론입니다. 우리 사회를 보수와 진보로 가를 때 온갖 주제가 많지만 그중에 제일 큰 게 한반도 남북문제예요. 평화 문제가 38선쪽에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나눔과 섬김'은 소수자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어요. 사람을 섬기자 그리고 주제를 사회복지, 환경, 문화 이런 분야가 들어가고요. '지역 공동체'는 대구 경북 안에 있는 많은 사회적 현안들을 다뤄보겠다는 겁니다."

- 대안언론으로서의 평화뉴스인데요. 기존 언론과 차이를 두고자 한 지점이 무엇인가요?

"그전에는 공중파 방송, 종이신문 딱 두 가지 외에는 언론의 형식으로 다른 건 거의 없었어요. 방송이냐 종이냐 딱 틀에 박힌 매체의 형식에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하나의 형식적 대안이 나온 거죠. 대안언론이라 하는 건 형식의 대안도 있지만, 내용에 대한 대안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처음에 차이점으로 삼은 건 크게 딱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언론에 대한 언론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은 대구 지역사회의 진보적 의제를 담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기자들의 고백'이라는 연재로 기자의 입으로 언론계의 관행과 문제를 다뤘어요. 매체 비평이나 신문 윤리, 언론과 관련된 기사를 참 많이 했었고요. 그때는 기자에게 촌지도 많았거든요. 촌지에 대한 보도를 좀 여러 번 하고 촌지가 없어졌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 전에 제가 방송국에 있을 때는 신문 방송에서 지금처럼 소수자라든가 민주노총, 시민단체 이런 게 크게 부각이 안 됐어요. 저는 시민단체가 하는 것이 지역사회 의제가 된다고 생각하고 참 많이 찾아다니고 그랬어요. 평화뉴스에서 시민사회 관련 이야기를 쓰면 다른 언론들도 많이 인용도 하고 했습니다. 아마 분명히 잔잔하게 영향이 있었을 거예요.

기존 신문과 방송에 출연한다든가 글을 쓴다든가 하는 게 장벽이 높잖아요. 지금까지 평화뉴스에 글 쓰는 사람이 한 500명 넘지 않을까 싶어요. 왜 신문 보면 유명한 교수들이 칼럼을 쓰는데, 저는 시민사회에서 한 10년 이상 해온 사람들을 어떤 칼럼진보다 좋다 생각해서 섭외도 하고 형태도 많이 고민하고 그랬죠."

신문법 개정, 포기 않고 싸워 위헌 판결까지 이뤄내

- 평화뉴스가 창간 20년이 되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성인이 된 건데, 인생 그래프처럼 평화뉴스 그래프를 그리자면 곡선이 어떻게 될까요?

"언제 망해도 안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했는데 저도 신기하게 그냥 이렇게 하고 있어요. 하여튼 어려움을 참 많이 겪었어요.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이 나왔을 때 진짜 평화뉴스 힘으로 위헌 소송을 만들었어요. (박근혜 정부는 2015년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을 발표했다. 5인 이하의 인터넷 언론사는 언론으로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 기자 말) 박근혜 정부가 신문법을 바꿔서 한 4~5천 개 되는 인터넷신문을 없애려고 한 거예요. 안 그래도 취재하기 힘든데 기자가 5인 미만이어서 등록 취소돼 버리면 누가 신뢰를 하겠어요. 사실상 폐간인데 시행령 개정안으로 한 줄 바꿔서 이걸 넣어버린 거예요. 이게 딱 터지고 나니까 전국에 수천 개의 인터넷 신문들이 난감했죠. 유예 기간은 1년이었어요. 예를 들어 올해 11월에 시행 예고를 해서 1년 후에 행정조치를 하겠다 하면 적어도 4천 개 인터넷 지면이 없어지는 거였죠.

형평에도 안 맞고 정의에도 안 맞고 언론 자유도 안 맞다 그런 생각을 했는데 전국에서 정말 아무도 안 나서는 거예요. 그냥 막 답답해 죽겠어서 뭐라도 해야 되겠다 싶어서 대구 민변을 찾아갔죠. 시행령이 적용되면 안 되는 10가지 이유를 A4 한 장으로 정리해서 돌리고 좀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때가 박근혜 정부 3년 차였기 때문에 권력의 최정점이었습니다. 제가 설치고 다녔고, 민변 쪽에서 공익 소송을 하게 됐어요. 전국적인 토론회, 기자회견을 다 대구에서 했고, 전국에서 대구만 신문법 개정에 반대하는 대책위가 생겼어요. 그다음에 위헌 판결을 받아냈죠. 그래서 4천 개 인터넷 신문이 살아남은 거예요.

소규모 언론사는 두세 명도 겨우 버티는데, 5명은 어떻게 맞추겠어요. 저는 이거를 일단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대부분 자기들끼리 서류상으로만 다섯을 맞춰놓는 거죠. 그걸 보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부당한 걸 보면 부당하다고 말을 해야 되는데 꼼수로 극복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다행히 시행령이 위헌 판결을 받았고, 이제는 판결이 있으니 그런 짓은 못 할 겁니다. 부당한 건 싸우면서 우리가 원래 추구해야 하는 걸 해야 하잖아요."

- 대구를 보수의 심장이라고 표현하는 건 단편적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 보수적이 도시라는 인식 말고 부각하고 싶은 대구의 모습이 있나요?

"옛날에는 대구를 한국의 모스크바라고 했었는데요. 그게 전쟁 이후에 피난 갈 때 대구는 공격을 안 받았으니까 진보적인 문인들이 대구에 많이 오면서 60년대까지 대구는 진보적인 도시였죠. 그러다가 박정희 정권이 들어오고 인혁당 사건이 터지고, 전두환 노태우로 군사 정권을 이어오면서 독재자들의 고향이 되다 보니 대구가 아무래도 혜택을 많이 누리고 살고, 집권자에 가깝게 맞춰진 거예요.

대구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다, 보수 텃밭이다 이거는 맞는 말이에요. 근데 심장은 태어날 때부터 있잖아요. 그러니까 대구가 한 50년 전만 봐도 보수 아니었거든요. 진보적이다가 보수적이다가 성향은 변화하고 있는 건데, 대구는 보수의 심장이다 이렇게 하는 건 규정을 지어버린 거예요. 규정 짓는 것 때문에 변화의 폭을 위축시키고 있는 거죠. 대구는 보수의 심장이라고 규정을 집어넣으면 그 다음에 갈 방향이 없어요. '대구는 원래 그렇잖아. 대구 사람 원래 그렇잖아' 하고 시민만 욕하게 돼요."
 
 과거 인터뷰 기사 스크랩, 유지웅 기자의 “우직하게 바른 길 걷는 마음의 심지”는 여전하다.
ⓒ 생명평화아시아 이명은
   
빈민운동, 청년운동을 하며 삶의 애환을 담은 기사를 쓰려 해

- 기자로서의 꿈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나요?

"언론 기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대학 졸업하면서 했어요. 그런데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 보니 공부를 못했고 이제 취업 준비를 하자 했을 때 평화방송에 입사했어요. 운이 좋았던 셈이죠. 대학 다닐 때는 학생회 활동, 학회 활동도 조금 했지만, 교지 편집을 가장 열심히 했어요. 한 3년을 교지 편집실에 있으면서 취재하고 전국 대학을 돌아다니고 기획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냥 기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기자를 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저는 단정하는 버릇이 없어졌어요. 나만이 옳다는 생각이 항상 오류를 낳는 거죠. 그래서 '알아도 모른다. 어중간하게 아는 거는 아는 게 아니다.' 기자를 하면서 이런 습성들을 스스로 좀 많이 키워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배들한테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하게 되고요. 글을 써 놓고도 이게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하는 거죠.

한편으로는 제가 이제 89학번이니까 학생운동을 기본으로 했는데, 우연히 빈민 지역 운동을 같이 많이 하게 됐어요. 그리고 성당에 다녔으니까 청년운동도 하고요. 사회 운동을 세 가지를 하게 됐는데 다른 운동은 학생운동과는 다르더라고요. 대학생은 다들 20대에 진보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성당 청년회에만 가도 중졸도 있고 고졸도 있고 대학원 졸업생도 있고 직장인도 있고 다 섞여 있거든요. 거기에서 어떤 일을 같이 해낸다는 거는 정말로 이 뭐랄까 상당한 노력이 훨씬 더 필요하죠. 그래서 동지여 나가자 이런 게 안 통하죠.

그리고 빈민 지역 운동 같은 경우도 경북대 근처 감나무골(대구 북구 대현동)이라고 있는데, 여기를 경험하면서 더 고개가 숙여졌어요. 사람들이 정말로 빈민, 서민으로 사는 걸 보고 정말 많이 배웠죠. 사람이 사는 걸 보면 사람 자체가 목적이 돼요. 학생운동은 자꾸 사람이나 어떤 계층을 운동의 도구로 많이 생각하는 게 있었거든요. 농민운동, 노동운동, 빈민운동처럼 절박하게 사는 사람들 삶 자체가 귀했어요. 우연히 20대 때 이런 걸 경험하다 보니까 내가 학교에서 하는 말은 정말 참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고 그랬죠."

- 예전 인터뷰를 찾아보니 심장 깊숙이 들어갔다 나오는 글을 쓰고 싶다고 하셨네요. 어떤 글이 심장 깊숙이 들어갔다 나오는 글일지요?

"저는 그냥 여전히 대안을 찾아가고 있는 기자 같아요. 진짜 바른 언론을 하고 싶었어요. 매일매일 기사 제목 하나를 가지고도 막 30분, 1시간 동안 고민을 해요. 토시 하나 가지고 고민하듯이, 바른 언론은 무엇인지 고민을 해야되는 거죠. 다른 언론, 대안을 찾아가는데 그 가장 중심 이제 삶의 애환이 있지 않을까 해요. 삶의 애환을 담아낼 수 있는 기자를 지금도 꿈꾸죠.

유명한 사람이 100억을 기부했다 이런 거 말고요. 참 열심히 사는데 인생 잘 안 풀리는 그런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진짜 저는 기사라고 생각을 해요. 진짜 사람 인터뷰 있잖아요. 우리가 추구하는 게 있다면은 가장 큰 게 사람인데, 그 사람의 삶을 담아내는 거요. 언론의 비판성과 사람의 가치를 같이 가져가는 게 생명이라는 생각을 해요. 결국에는 삶의 애환을 담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시대가 어떻게 바뀌어도 이런 기사가 언론의 가장 큰 의미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 여러 기획이 많았잖아요. 기자들의 고백도 주목을 많이 받았고요. 독자들이 다시 한번 봐주었으면 하는 기획이 있으신가요?

"만약에 책으로 낸다면 평화뉴스 칼럼이 정말 대단하고 좋았어요. 따로 엮어서 책을 내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닌데 그럴 여유를 잘 못 가지고 그랬어요. 여유를 좀 가지면 그런 기획을 엮어서 진짜 의미 있는 책을 내고 싶죠. 기자들 고백도 그렇고, 지금 다시 읽어봐도 좀 새롭고 재밌을 것 같아요. '기자들 고백' 할 때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1년 동안 40명이 릴레이 고백을 했어요. 지역 웬만한 기자들은 거의 다 썼다고 보면 돼요. 이게 우리 언론 역사에서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다른 신문에서도 참 많이 조명했습니다.

 
 사무실 한편에 걸린 평화뉴스 붓글씨를 바라보는 유지웅 기자, 평화뉴스는 지난 20년간 대구·경북의 진보 역사를 기사로 꾸준히 담아왔다.
ⓒ 생명평화아시아 이명은
   
누군가 대안언론을 시작할 때 평화뉴스가 참고가 되었으면
 

- 앞으로의 소망이나 계획은 어떤 건가요?

"대안언론을 반석에 올려놓고 싶은 생각이 정말 커요. 이후에 그 누구라도 이 대안언론이나 새로운 시도를 하고자 할 때 하나의 사례가 될 거잖아요. 제가 대안언론을 시도하니까 잘 되겠냐고 의심하는 눈초리가 되게 아팠거든요. 저는 처음에 언론사를 만드는 것부터 모든 게 다 처음이었으니까 환장하겠더라고요. 근데 앞으로도 저 같은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참고할 수 있는 실패의 경험과 나름의 성과가 다 있는 거죠."

- 마지막 질문입니다. 독자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독자분들께는 늘 봐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대구 지역 진보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평화뉴스를 안 보고는 안 될 만큼 정말 열심히 차곡차곡 기사를 쌓아왔습니다. 기록성으로는 어떤 자산하고도 못 바꿀 만큼 귀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독자들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라고 하는데, 그러게요 하면서 안 하는 이유가 그쪽으로 폭을 한번 넓히면 계속 그것도 챙겨야 되잖아요. 그러면 적은 인력으로는 진짜 우리가 고민하는 지역사회 의제, 현안, 투쟁 이런 걸 못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폭을 넓히지 않는다는 거는 그만한 고민이 또 있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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