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일하랴 손주 보랴…'할마·할빠 육아휴직' 제한적 허용 검토
정부가 일하는 조부모도 육아휴직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일명 ‘할마’(할머니 엄마)·‘할빠’(할아버지 아빠)가 손자녀를 돌보는 황혼 육아가 늘면서다. 한국의 합계 출산율이 지난해 0.72명까지 떨어진 현실에서 육아휴직 제도 유연성을 높이려는 취지다. 하지만 자칫 돌봄 부담을 제도적으로 조부모에게 전가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10일 중앙일보가 입수한 ‘근로자 모성 보호 제도 확대에 관한 연구’ 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현행 고용보험법상 육아휴직급여나 육아기근로시간단축 등 돌봄 제도는 부모만 활용할 수 있다. 일하는 조부모는 손자녀를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두거나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해당 보고서는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7월 한국직업능력연구원에 연구 용역을 의뢰한 결과다.
이는 조부모 돌봄이 확대되는 현 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통계청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년층의 가사노동 생산액은 2014년 49조2040억원에서 2019년 80조9000억원으로 5년 새 64.4% 늘어났다. 특히 2019년 한 해에만 노년층이 따로 사는 손자녀를 돌보는 데 투입한 노동가치만 3조원을 넘겼다. 고용부가 2020년 코로나로 인한 휴원·휴교 기간에 자녀를 돌본 사람을 조사한 결과에선 조부모·친척(43%)인 경우가 부모(36%)보다 많았다.
보고서는 “조부모의 육아 도움이 불가피한 가정이 점차 늘면서 육아휴직 등 제도를 조부모에게 확대 적용하자는 요구가 제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호주는 공식 제도화…일본은 기업·지자체 차원 확대
독일에선 부모가 심각하게 아프거나 장애가 있어 직접 키우지 못할 경우 조부모에게 육아휴직급여 수급자격을 부여한다. 포르투갈은 손자녀가 미성년자이거나 장애가 있는데 부모가 돌볼 수 없는 경우 등에 한해 허용한다. 핀란드에선 출생아 생모가 사망하고 다른 부모가 아이를 돌볼 수 없는 경우 조부모 등 실제 아이를 돌보는 사람에게 육아휴직급여를 지급한다.
계속고용 제도가 정착한 일본의 경우 중앙정부 차원에서 조부모 육아휴직이 법제화되진 않았지만, 일반 기업과 지자체에서 손자를 위한 육아 휴가 제도를 운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전문가 “노동 가치 인정”vs“제도적 책임 전가”
다만 한국에서 조부모 육아휴직을 제도화하는 방안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신자은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부모 입장에선 '누가 안정적으로 육아를 맡아줄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며 "본인이나 외국인 도우미 등을 통한 돌봄이 어려운 상황에서 직장을 다니는 조부모도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돌봄 노동 책임을 자칫 제도적으로 할머니 등 다른 가족에게 전가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연구원은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는 범위를 조부모로 넓히는 것은 단순히 혜택의 확장이 아니라 조부모에게 돌봄의 의무를 부과하는 정책 메시지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보편적 적용은 맞지 않아…제한적 적용 검토”
이에 보고서는 부모가 육아휴직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만 조부모 육아휴직을 단계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부작용을 줄이면서 최소한의 사각지대를 보완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부모가 조부모 1인에게 육아휴직 사용을 양도할 수 있는 대상을 ▶1단계 조손 가정(손자녀가 부모와 떨어져 조부모에게 양육되는 가족) ▶2단계 중증장애인 가정 ▶3단계 한부모 가정으로 점차 확대하는 식이다. 또한 급여 기준과 기간을 부모 육아휴직과 같은 조건으로 지급하고, 조부모 육아휴직과 나머지 부모 1인의 육아휴직 활용 시기는 중복될 수 없게 설계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도 ‘제한적 적용’에 방점을 두고 도입 실효성을 검토하고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전문가들의 지적대로 보편적인 조부모 육아휴직 허용은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조손 가정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 한해 조부모 육아휴직을 확대 적용하는 방안을 수요 조사 등과 함께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세종=나상현 기자 na.sang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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