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일본 개신교 최초 선교사는 한국과 관련이 있다

신상목 2024. 3. 11.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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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본격적인 봄으로 접어드는 걸까요. 이번 주 일기예보를 보니 그동안 날씨와 확실히 다릅니다. 낮 기온도 부쩍 올라서 주말에는 18도까지 올라가네요. 양지바른 곳에는 개나리나 진달래가 모습을 드러낼까요. 참 긴 겨울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부터 더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낯선 이에게도 인사 한마디 해주시고요.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는 옆 나라 일본 개신교의 문을 연 선교사님 얘기로 시작합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26년 개신교 역사가 빠릅니다. 첫 선교사님은 제임스 헵번이란 선교사님인데요. 이 분은 한국 초기 교회사와도 연결이 됩니다.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살펴봐 주시고요.
돌아오는 주일이 세인트 패트릭 데이입니다. 매년 3월 17일이면 아일랜드를 비롯해 영국 미국 등 많은 나라에서 녹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축제를 열지요. 바로 그 주인공인 세인트 패트릭이 누구인지 한번 만나 보세요. 스코틀랜드의 토마스 찰머스란 분은 좀 생소하실 텐데요. 이분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19세 초였는데 그때부터 벌써 교회 대형화를 막기 위해 교회 분립을 주장했던 분입니다.

언더우드가 만난 일본 개신교 최초 선교사
1815년 3월 13일 미국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이자 일본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던 제임스 C. 헵번(Hepburn)이 펜실베이니아주 밀턴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1859년 10월 가나가와에 상륙해 선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앞서 중국에서는 5년간 사역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1854년 3월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일 화친조약이 체결되자 미국인들이 일본에 주재하게 됐고 그들의 신앙을 돌보기 위해 교역자가 필요해졌습니다. 햅번은 이때 처음으로 일본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였습니다.


당시는 일본 내에서 기독교 금교령이 엄격했던 때였습니다. 따라서 외국 선교사들이 일본에 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었으며 일본 주재 자국민을 위한 목회 사역만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헵번을 비롯해 그 이후 입국한 미국 선교사들은 조금의 두려움 없이 일본 선교의 문이 열릴 것이라 믿고 인근 불교사찰인 성불사에 들어가 진료소를 개설해 사람들을 돌봤고 기도와 찬송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합니다.

햅번의 본격적인 선교 활동은 1862년 요코하마 야마테 거류지로 자리를 옮기면서 구체화합니다. 그는 의료사업과 함께 성서번역, 영일사전 편찬 사역에 착수했습니다. 그리하여 1873년 마태복음, 1875년 마가복음을 일본어로 각각 번역했으며 성서번역위원장이 되어 1880년 신약, 1887년 구약을 번역, 완성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있던 우리나라의 이수정은 1885년 ‘신약 마가전복음서 언해’를 번역했는데 이때 헵번의 번역본을 참고했다고 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에 들어오기 전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를 배우고 이수정 번역 성경을 읽었습니다. 이때 이수정과 함께 있던 공간이 바로 헵번 선교사의 사택이었다고 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내한 이후 자주 일본을 방문해 헵번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헵번 선교사는 한국의 초대교회 역사와도 관련이 깊은 셈입니다.

헵번 선교사의 사택 자리엔 1949년 10월 기념비가 세워지는데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헵번 박사는 1859년 10월 10일 미합중국 북부에서 넘어오셔서 요코하마 거류지 최초의 거류자 가운데 한 명이 되어 이 땅에 시료 전도소를 마련한 뒤 구미 의술을 도입하셨고, Hepburn이라는 로마자에 의한 화영어림집성(和英語林集成·사전)의 편찬, 신구약 성서의 번역 등 일본 문화의 개척에 온 힘을 기울이셨고 시로교회 및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의 창립자가 되셨다.”

노예로 잡혀갔던 땅의 선교사가 되다
461년 3월 17일 아일랜드 선교사인 패트릭이 사망합니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사도이자 성인으로 불립니다. 라틴어 이름은 파트리치우스(Patricius)입니다. 부유한 로마계 영국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6살 때 해적에게 납치돼 아일랜드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패트릭이 끌려간 장소는 아일랜드 서부 해안가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려진 바 없습니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양치기 노예로 일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날 꿈에서 “네 양이 준비됐다”는 목소리를 듣고 바다 건너 갈리아(프랑스 지역)로 도망친 그는 레랑의 한 수도원에서 수련을 받으며 사제가 됐습니다. 그 후 ‘아일랜드로 다시 돌아가 설교하라’는 환상을 경험했고 432년 아일랜드로 건너갔습니다. 자신을 노예로 만든 켈트족을 위한 선교사로 간 것입니다.

당시 로마교회는 켈트족 선교를 불가능한 것으로 봤습니다. 켈트족은 태양과 땅 등 자연을 숭배하는 드루이드교(druidism)를 강하게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패트릭은 아일랜드 원주민에 대한 편견에 굴하지 않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과거 노예로 지내면서 배운 켈트족 언어와 문화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패트릭은 이들에게 예수를 소개하면서 태양을 관통하며 태양보다 더 큰 십자가의 이미지(이 십자가가 가로축보다 세로축이 더 길고 가운데 원이 있는 켈트 십자가이다)를 겹치게 함으로써 새롭고 강력한 종교를 전파했습니다. 성경 속 인물에 대해서도 그는 켈트인들의 성향을 고려해 무용담처럼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아일랜드 민담에 따르면 패트릭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잎이 3개인 토끼풀에 비유해 설명했다고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셋으로 하나인 것은 토끼풀이 3장의 잎으로 이루어졌지만 1개인 것과 동일하다고 설교한 것입니다. 그는 원주민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고 경험을 바탕으로 생활 속에서 그들이 이교도 의식을 멈추도록 설득하며 선교 활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그 결과 아일랜드에 수도원이 설립되고 이곳들을 중심으로 고대의 학문이 전수됐습니다. 그로 인해 아일랜드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갖가지 침입과 약탈을 면할 수 있었으며 이곳 수도원들이야말로 고대 로마제국의 문명과 문화를 보전해 후대에 전수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은 복음을 받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옆 나라인 스코틀랜드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선교사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563년경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작은 섬 이오나에 정착했던 콜룸바입니다. 이곳에 설립한 수도원은 아일랜드 선교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이러한 선교 활동은 남쪽으로 옮겨 내려가 앵글족과 색슨족들에게 접촉했습니다.

아일랜드에서는 9~10세기경부터 패트릭 선교사를 기리기 위해 ‘세인트 패트릭 데이(St. Patrick’s Day)’를 기념해왔습니다. 17세기에는 패트릭이 세상을 떠난 3월 17일을 교회의 공식 축일로 지정했습니다. 1903년엔 아일랜드에서 이날을 국경일로 기념하게 됩니다. 이날은 아일랜드계 이주민들이 많이 사는 미국 영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지에서 세인트 패트릭 데이 행사를 열어 아일랜드 민족의 정체성과 그들의 문화를 확인합니다.

현재 아일랜드의 종교 분포는 로마가톨릭교회(78.3%)가 다수를 차지합니다. 아일랜드 교회(2.7%), 개신교(1.6%), 정교회(1.3%), 이슬람(1.3%), 기타(2.4%), 무교(9.8%) 등으로 나타납니다.

19세기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으로 불렸던 사람
1780년 3월 17일 목사이자 학자, 사회 개혁가이며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CS)의 창립자 중 한 명인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가 태어납니다. 1847년 별세할 때까지 그는 세인트앤드루대, 에든버러대 교수, 그리고 글라스고 등 3곳에서 목회를 하면서 공장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1843년에는 스코틀랜드 교회 성직자 3분의 1과 평신도 절반을 FCS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교회 확장 운동을 펼쳤으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총회장(1832)도 역임했습니다. 일생 그는 도시 빈민들의 복음화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19세기 가장 위대한 성도로 불렸습니다.

그는 해박한 지식을 소유한 목회자 수학자 정치가였을 뿐 아니라 교회 지도자, 사회 운동가였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명성은 신학자로서 그가 끼친 영향력에 있었습니다. 찰머스의 신학은 그의 ‘신학개요’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신학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철저히 성경에 기초한 신학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목적과 인간의 미래적 운명의 불확실성을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기록된 계시의 말씀, 성경으로 입증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성경을 떠나서 우리에게 어떤 것도 말씀하지 않으신다. 특히 신비주의와 관련해 찰머스는 “성령은 항상 말씀에 의해, 말씀과 함께 역사한다. 성령은 결코 말씀을 떠나서는 역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또 기독교의 주된 문제를 토론했을 때 △질병의 회복을 위해 복음적 치유가 제시돼야 하며 △복음적 치료를 어떻게 규명해야 하는지에 대해 △복음적 치유의 범위를 역설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복음이 직접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의하고 설교자의 책임은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신학 강의는 단지 강의실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어야 할 것으로, 설교와 구별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목회자가 설교를 통해 신학을 강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설교는 곧 신학의 총합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회의 대형화를 막기 위해 적당한 규모의 교회를 여럿 세우도록 권유하며 교회 분립 개척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교회 간섭과 주권 침해에 강력히 대항했습니다. 그는 기존 교회 내에서는 개혁할 수 없다고 판단,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조직했습니다.

찰머스는 영적 민감함을 유지하기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안에 현존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바르게 될 것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욱 솔직히 닮아가게 하소서. 나는 나 자신의 부인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의 십자가를 날마다 지게 하시고 나를 값주고 피로 사신 그분의 헌신된 종으로서 살게 하소서.’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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