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적, 숨 쉴 수 없을 만큼 감동"...K클래식, 뉴요커 홀렸다
지난 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투란도트’의 세번째 막이 시작되자 객석에선 숨소리마저 사라졌다. 아리아 ‘아무도 잠들지 마라(Nessun dorma)’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한 남자의 목소리만이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숨이 멎을 듯 이어진 그의 노래가 ‘승리(Vincero)’라는 가사로 끝이 나고서야 참았던 박수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공연 중간이었지만 “믿을 수 없는 목소리(incredible voice)”란 찬사와 함께 환호는 1분 넘게 이어졌다.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홀로 우뚝 선 남자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화답했다.
뉴욕을 매료시킨 K-클래식 바통을 이어받은 이는 한국인 테너 백석종(37)이다. 3년 전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향한 그의 중·저음과 고음을 절묘하게 넘나드는 목소리가 세계 최고 무대 중 하나로 꼽히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을 접수했다.
“평생 투란도트를 10번 넘게 봤지만 저런 목소리를 내는 칼라프(백석종 배역·남자 주인공)는 처음이다. 저 가수가 공연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관람하고 싶다”(마이클 데이비드)“그의 노래는 한 순간도 놓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특히 3막에선 정말 숨을 쉴 수도 없었다”(브랜다 닐슨) 기자가 확인한 뜨거운 객석의 반응들이다.
공연을 마친 백석종은 겸손했지만,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사실 한국인이 세계 무대에 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 노력하면 언젠가 관객도 인정해 줄 것이다. 후배들에게도 내 길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이날 신하 ‘핑’의 역할을 맡아 백씨와 함께 무대에 오른 바리톤 강주원 씨는 “오늘 나온 반응은 사실 한 번도 없던 일”이라며 “지휘자가 센스 있게 노래를 더 하게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NYT)는 최근 백석종을 “젊음과 가창력, 카리스마를 갖춘 ‘꿈의 칼리프’를 발견했다”며 “세계 음악계를 이끌 세기적 테너로 본인의 이름을 똑똑히 각인시켰다”고 극찬했다. 이날 NYT엔 해당 기사 외에도 한국 음악과 관련된 기사가 3건 실렸다.
한국의 클래식 음악의 질주가 거침이 없다. 그리고 그 질주는 뉴욕을 비롯한 미국까지 본격적으로 흔들어 대고 있다.
한국의 젊은 음악인들은 ‘황금의 K세대’로 불리며 클래식의 본고장 유럽 등 국제 콩쿠르에서 화려한 성과를 거뒀다. 조성진이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해 박재홍(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양인모(장 시벨리우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최하영(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첼로 부문) 등이 주요 콩쿠르를 휩쓸었다. 특히 임윤찬이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18세 최연소로 우승한 것은 현 세대 예술인들이 거둔 성과의 정점이자, 한국 클래식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계기로 평가받는다.
한국 클래식의 무서운 신예들은 미국, 특히 역사적으로 숱한 클래식 스타들을 탄생시킨 뉴욕을 사로잡고 있다. 특히 이 중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임윤찬은 ‘진찬 투톱’으로 불리며 한국 클래식의 르네상스를 이끌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최단 시간 매진 기록’ 경쟁을 벌이는 등 이미 ‘티켓 파워’가 가장 큰 음악가 반열에 올랐다.
장르를 불문하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악가들이 공연을 했던 ‘꿈의 무대’ 카네기홀은 2022년 이후 내년까지 4년 연속 조성진을 초청했고, 지난달 카네기홀에 데뷔한 임윤찬 역시 내년에도 무대에 오른다. 카네기홀은 특히 임윤찬의 티켓을 사려면 다른 공연 표까지 묶어서 구입해야 하는 ‘패키지 마케팅’을 펴고 있다. 그의 예술적 입지와 셀링 파워가 그만큼 엄청나다는 의미다.
한국 음악인들의 활약은 두 사람이 전부가 아니다. 뉴욕의 주요 공연장의 일정에는 이미 한국 음악가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피아니스트 손민수, 첼리스트 최하영, 바이올리니스트 제니퍼고가 올해 카네기홀 무대에 오른다. 내년 1월엔 역시 카네기홀에서 정명훈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예정이다.
뉴욕필하모닉에선 지난달 마에스트라 김은선의 지휘 무대가 있었다. 소프라노 박혜상도 4월 뉴욕필 공연을 앞두고 있다. 메트로폴리탄에선 다음달 카운터테너 정시만의 정식 데뷔가 예정돼 있고, 내년에도 테너 백석종(토스카), 바리톤 김기훈·베이스 박종민(라 보엠), 소프라노 박혜상, 테너 듀크 김(마술피리)이 공연한다.
또 아메리칸발레시어터(American Ballet Theater)의 여름 시즌엔 서희, 안주원, 박선미 등이 출연한다.
뉴욕에서 만난 구삼열 전 국가브랜드위원장은 한국의 클래식이 미국에서 주목 받는 배경에 대해 “예술에선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현재 한국의 클래식도 사실 오랫동안 누군가 뿌려온 씨가 성과를 맺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950년대 피아니스트 한동일이 카네기홀에 선 것이 ‘정트리오(정명훈·정경화·정명화)’를 만들었고, 이들이 현재 한국 클래식의 토양이 됐다”며 “이제 전세계 어떤 오케스트라도 한국인 없이 운영되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인이 진출해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뉴욕필에서만 한국인 단원 13명이 활약 중이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도 6명의 한국인이 주요 파트를 맡고 있다.
구 전 위원장은 “조성진·임윤찬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특히 동양인의 물리적 한계로 여겨졌던 남성 오페라 가수가 인정받은 것은 ‘가지 못했던 길’을 개척했다는 의미”라며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했던 발레에서도 놀랄만한 성과가 날 수 있다”고 말했다.
관건은 꾸준하고 장기적인 투자다. 그는 “돈 없는 예술가에게 기회를 준 국립한국종합예술대학 설립처럼 투자가 있어야 미래도 생긴다”며 “세계 예술 단체의 주요 후원자 명단에 중국인이 다수 포함된 것과 달리 한국인은 드물다는 사실은 향후 세계 음악계가 어떻게 재편될지에 대한 지표가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 카네기홀 대표 "한국인에겐 놀라운 열정이 있다"
「 미국 뉴욕의 3대 예술관으로 꼽히는 카네기홀의 클라이브 길린슨 대표 겸 예술감독은 “한국 사회 전반에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놀랍고 고무적인 열정이 있다”며 “한국 예술인들의 놀라운 재능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길린슨 대표는 9일(현지시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환상적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이미 전세계 관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몇 주 전 임윤찬은 카네기홀 데뷔부터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Q : 한국 음악가만의 특징이나 강점이 있는가.
A : “한 세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들은 다음 세대에도 영감을 준다. 수십 년간 카네기홀과 전 세계에서 찬사를 받아온 지휘자 정명훈이 이런 경우다. 세계 최고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한국의 뛰어난 인재 풀과 맞물려 클래식 음악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의 예술가들을 배출하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메트로폴린탄 오케스트라가 내년 정명훈에게 다시 지휘를 맡긴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Q : ‘K팝’에 이어 클래식에서의 ‘한류 열풍’을 말하는 기류도 있다.
A : “K팝이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고, 이후 한국 클래식 음악가들에 대한 관심을 더 높인 점은 흥미롭다. 실제 한국 예술인들의 카네기홀 공연을 직접 보기 위해 전세계에서 뉴욕으로 날아오는 열성적인 팬들을 직접 확인하고 있다. 동시에 한국 음악인들이 주요 콩쿠르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낸 것도 이들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의 예술인들이 주목받는 이유가 결코 트렌드에 편승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놀라운 재능과 음악적 깊이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Q : 최근 클래식 전문앱이 출시되는 등 클래식의 저변 자체가 달라진다는 평가도 있다.
A : “카네기홀이 애플 뮤직 클래시컬 앱 출시 전부터 파트너로 참여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기술 덕에 클래식 음악을 더 널리 보급하고 합리적 가격으로 최고 품질의 음악을 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기쁜 일이다. 디지털이 라이브 현장의 스릴, 즉흥성, 공동체 의식까지 대체하긴 어렵겠지만, 처음 클래식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클래식에 대한 좋은 진입로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Q : 한국에서도 재능 있는 예술인들이 배출되고 있지만, 많은 예술 단체는 재정난을 겪고 있다.
A : “아무리 좋은 시기라 해도 젊은 예술가들은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 뿐 아니라 많은 곳에서 음악을 하려면 열정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카네기홀 등 예술 단체에 참여하거나 앙상블의 일원으로 경력을 쌓는 길도 있지만, 다행히 지금은 기술의 발전으로 젊은 음악인에게 보다 상업적이고 창의적인 길이 생기고 있다. 전통적 공연장 역시 공연 뿐 아니라 교육, 소통 등으로 기능을 확대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적 포트폴리오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뉴욕=강태화 특파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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