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큰 병원행 줄었다…'전공의 공백'이 준 의료개혁 힌트 [view]

신성식, 채혜선 2024. 3. 1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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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증원 갈등으로 인한 진료 차질이 발생한지 20일 지났다. 전공의의 대부분은 병원으로 복귀하지 않고 있다. 100개 수련병원 전공의 1만1994명(92.9%)이 계약을 포기하거나 근무지를 이탈한 상태다. 정부는 11일부터 한 달간 20개 대형병원에 군의관 20명, 공중보건의사 138명을 파견한다. 전공의 파업을 견딜 수 있는 변곡점을 열흘로 봤으나 20일이 지났는데도 큰 사고 없이 비상진료체계가 굴러가고 있다. 가장 큰 걱정거리가 중환자와 응급환자인데 이 부분에서 ‘정상’이 이어진다. 상급종합병원의 중환자실 입원환자는 약 3000명대를 유지하며 별 변동이 없다. 중증 응급환자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중등도(중증과 경증 사이) 이하 환자(7일 기준)가 지난달 1~7일보다 32.1% 줄었다.

10일 오후 지방의 한 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 앞으로 환자와 보호자 등 방문객들이 이동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전문가들은 전공의 파업이 야기한 비상상황이 한국 의료의 고질적 병폐를 일부 줄이고 있다고 평가한다. 대형병원 쏠림이나 응급실 과밀화가 줄고, 진료지원 인력(PA)이 합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현대병원 김부섭 원장은 “이번 기회에 대형병원 쏠림을 줄여 의료전달체계를 정비하고, 전문의 중심병원으로 전환해 전공의를 교육생으로 되돌리는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거대공룡 몸집 줄이기


소위 ‘빅 5’병원을 비롯한 대형병원 오전 11시는 도떼기시장이다. 진료가 끝난 환자와 보호자, 막 들어온 환자가 뒤섞이면서 발디딜 틈이 없다. 서울아산병원은 하루 외래환자가 1만4000~1만5000명이다. 신촌세브란스는 1만~1만1000명, 서울대 1만명, 삼성서울은 9500명, 서울성모병원은 7240명이다. 그래서 빅 5병원이 전국 환자를 빨아들인다는 지적을 받는다. 도쿄대의학부 부속병원은 하루 외래환자가 3500명에 불과하다.

전공의 파업 후 빅 5병원은 수술을 절반 정도 줄였다. 양성종양·척추·이비인후과 등의 급하지 않은 수술은 미뤘다. 외래환자는 20~30% 줄었다. 재진 환자 위주로 운영하고 신규환자는 급한 경우만 받는다. 대신 본래 역할에 충실해졌다. 일반적 분만 환자는 지역병원으로 보내고 고위험 산모 위주로 치료한다. 장기이식·중환자실·신생아중환자실·소아종양·백혈병, 급한 뇌·심장병 환자 진료는 종전과 별 차이 없다.

평소에는 동네의원 진료의뢰서를 형식적으로 받아서 대형병원으로 직행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 외래환자 1만명’이라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 굳어졌다. 선진국의 3차 병원(주로 상급종합병원)은 중증과 특수질환을 진료하지 경증·중등증을 보지 않는다. 이런 환자가 대형병원에 몰리면 중증환자 진료 여력이 줄고 뒤로 밀린다. 병원은 낮은 수가(수술은 원가의 81.5%)를 만회하려고 신규 환자에게 각종 검사를 떠안겼다.

10일 서울 시내 대학병원 응급실에 구급차량이 들어서고 있다. 뉴스1

응급실 과밀도 줄어


중앙응급의료센터에 따르면 10일 오후 2시 기준으로 서울대병원을 제외한 빅4 병원의 응급실 병상이 남아 있다. 이날은 여느 일요일과 크게 달랐다. 가톨릭 중앙의료원의 한 간호사는 “확실히 응급실 환자가 줄었다. 환자가 아예 없는 ‘화이트 베드’가 평소 새벽에 드물게 생기는데, 요즘에는 이럴 때가 매우 많다”며 “중증·응급 환자만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기도의 구급대원 A씨는 “평촌한림대병원은 복통 등 경증환자를 안 받아서 군포 지샘병원으로 이송한다”고 말했다. 경기도 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중소병원 응급실조차도 경증환자가 30~40% 줄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보건 전문가는 “뒤죽박죽이던 의료전달체계가 (전공의 파업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면서 “이번 경험을 살려 제도를 제대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의 중심병원 전환


전공의의 93%가 빠져나가면서 전문의 중심병원으로 강제로 전환됐다. 서울대병원의 한 교수는 “비뇨기과·흉부외과 등은 원래 전공의가 거의 없었다. 이런 과는 전문의 중심으로 운영해왔고, 이런 경험이 지금의 밑거름이 된다”고 말했다. PA 활용도 급작스레 가능해졌다. 의사의 반발에 그간 눈치만 봐 왔다. 미국·영국·캐나다 등의 선진국에는 PA가 활발하게 활동한다. 미국PA는 자율적인 의사 결정을 하면서 의사의 감독 하에 위임 받은 업무를 한다. 환자치료·진단검사·수술·치료계획 수립·건강관리·응급처치·심폐소생술 등을 한다. 2013년 9만5583명에서 매년 증가해 2020년 14만8560명으로 늘었다. 영국은 전공의 업무를 포함해 폭넓은 영역을 커버한다. 다만 방사선 관련 검사나 처방, 약 처방은 불가능하다.
지난달 27일 대전의 한 대학병원을 찾은 시민들과 의료진이 로비를 이동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PA 자격증을 도입하는 방식이 아니라면 일본처럼 경계 영역을 분명히 하면 된다”며 “오래 걸릴 일이 아니어서 당장 가능하다”고 말했다.

코로나19의 경험이 이번 사태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당시 환자들은 큰 병원에 덜 가고, 응급실 이용을 자제했었다. 또 당장 급하지 않으면 의료 이용을 자제했다. 이런 소중한 경험이 의료 대란을 막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채혜선 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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