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민생 토론회’ 남발 주의보
재정 계획 없이 수십조 사업
정부의 신뢰도마저 해칠라
대통령 업무보고는 어떤 정부 부처든 피해갈 수 없는 연례행사 중 하나다. 부처별로 무슨 일을 할지 연초에 보고하고 이변이 없는 한 그 일정대로 한 해가 움직인다. 2000년대 들어 20여 년 동안 엇비슷한 패턴으로 진행되던 이 행사가 올해 격변을 맞았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민생토론회’라는 명패를 달고 생방송 화면에 등장했다.
부처 간 칸막이가 높았던 과거와 달라진 점이 적지 않다. 업무보고 내용을 생방송으로 국민에게 중계하면서 투명성을 높였다. 행사마다 특정 사안에 관련된 부처가 한꺼번에 움직이다 보니 주제 집중도도 합격점이다. 주제와 이해관계가 맞닿는 일반인이 토론자로 참여하는 점 역시 눈길을 끈다.
좋은 점수를 주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반대로 최악인 부분도 존재한다. 지난 1월 이후 지난주까지 2개월여 동안 18차례나 진행하면서 신선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 특히 발표 때마다 누적되는 숙제에 대한 우려가 크다. 정책 현실화를 위해 필요한 법 개정 사안은 늘고 있고 투입돼야 할 재정 규모도 점점 커지고 있다. 법이야 여대야소가 되면 해결할 수 있다지만 재정은 다른 문제다. 정부 곳간 어디에도 이 큰돈을 갑자기 꺼낼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신선도’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정부 발표의 ‘신뢰도’까지 떨어뜨릴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야당이 관권 선거운동이라며 총선용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합리적인 측면이 있다.
두드러지는 사례가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계획이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철도와 도로 지하화 계획만 해도 65조2000억원 규모인데 이 중 30조원은 국비로 충당해야 한다. 이명박정부 당시 5년간 사회적 논란을 불러왔던 4대강 사업 규모인 20조원을 훨씬 웃돈다. 지난주 17번째 민생토론회에서 발표한 국가장학금 제도 확대 역시 매한가지다. 100만명 선인 국가장학금 대상을 150만명으로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올해 국가장학금 예산은 4조7205억원이다. 발표대로라면 산술적으로 연간 2조3603억원이 더 필요해진다. 이 많은 예산을 어떻게 확보할지에 대한 재정 충당 계획은 없다시피 하다. 예산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는 각 부처의 장밋빛 목표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중이다.
사실상 사업 타당성조차 검증받지 못한 상태에서 내놓는 이 정책들은 재정건전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가 짙다. 허리띠를 졸라매겠다던 정부에서조차 국가채무가 1100조원을 넘어섰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40년이면 국가채무가 2939조1000억원으로 3000조원에 육박할 전망이다. 이 시기가 되면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100.7%로 버는 돈보다 빚이 더 많아지게 된다. 민생토론회에서 나온 예산 투자 규모를 다 빼도 이 정도 수준이다. 전 정부가 재정을 흥청망청 썼다며 비판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코로나19 때였던 2020년에 21대 총선을 앞두고 12조4000억원이라는 돈을 긴급 재난지원금 명목으로 뿌렸던 과거와 뭐가 달라졌나.
이렇게 발표한 정책들이 정권교체와 함께 공수표로 끝날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파장은 어떻게 할 건가. 탈원전 정책이 극명한 사례다. 서울대 원자력정책센터는 5년의 탈원전 정책으로 2030년까지 47조4000억원 비용이 발생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사회적 파장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국토부의 여러 발표는 부동산시장을 들썩이게 만드는데, 무위가 된다면 어떻게 하나 싶다. 정부만 보고 투자했다가 피해를 본 국민들에게 전 정권 탓을 하는 것은 위정자의 자세가 아니다.
여소야대 상황인 정부가 총선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심정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국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일을 즉흥적으로 처리하는 데는 동의하기 힘들다. 민생토론회 흥행에도 대통령 지지율이 국민 절반인 50%에 한참 못 미치는 이유를 곱씹어 보기를 바란다.
신준섭 경제부 기자 sman32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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