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연애했다고 팬에게 사과한 아이돌

양성희 2024. 3. 11. 00:3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아이돌의 연애가 죄인가. 급기야 외신까지 나섰다. BBC는 ‘K팝 스타 카리나, 연애 공개 후 사과’라는 기사에서 “분노한 팬들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비난하자 K팝 스타는 비굴한 사과문을 발표했다. K팝 산업은 (소속사와 팬들의) 압박으로 악명 높다”고 비판했다.

탤런트 이재욱과의 열애 인정 후 후폭풍에 시달린 걸그룹 에스파 멤버 카리나가 자신의 SNS에 팬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하는 자필 편지를 올렸다. [뉴스1, 카리나 인스타그램 캡처}

카리나는 SM 인기 걸그룹 에스파의 핵심 멤버다. 남다른 팬 사랑으로 팬들에게 ‘효녀’라 불리던 그녀가 탤런트 이재욱과의 열애설을 인정한 직후 상상하지 못한 후폭풍에 휘말렸다. 스타와 팬의 1대1 가상 채팅 서비스 ‘버블’을 통해 미주알고주알 사생활을 공유하던 그녀의 ‘몰래 한 사랑’에 팬덤이 발칵 뒤집혔다. 급기야 SM 사옥 앞에는 중국 팬이 보냈다는 시위 트럭이 등장했다. ‘팬의 사랑으로는 부족했냐. 사과하지 않으면 하락한 앨범 판매량과 텅 빈 콘서트 좌석을 보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섬뜩한 문구가 적혔다. 팬들의 날 선 반응에 SM 주가까지 출렁거렸다. 그녀가 열애설 인정 일주일 만에 SNS에 “놀라게 해드려 죄송하다. 마이(에스파 팬덤)들이 상처받은 부분 앞으로 잘 메워 가고 싶다”는 자필 사과문을 올리게 된 경위다.

「 외신도 주목 통제적 아이돌 문화
비틀린 양육자 팬덤 병폐 드러나
지속가능 K팝 미래 걸림돌 우려

아이돌의 연애는 늘 논란이었다. 기획사들이 관례처럼 ‘데뷔 *년간 연애 금지’를 강제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지금 외신들이 지적하는, 사생활의 자유가 없는 통제적인 K팝 아이돌 문화다. 그런데 이번 카리나 사태는 예의 ‘아이돌은 만인의 연인’이라는 차원을 넘어, 팬들의 과몰입과 과소비를 유발하는 상술과 비즈니스 모델로 덩치를 불려 온 K팝 산업과 팬덤의 비정상적인 면모를 드러낸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팬이 아이돌을 응원하고 키워가는 K팝 특유의 ‘양육자 팬덤’의 비틀린 면모다.
지금 아이돌의 인기는 ‘코어 팬덤’의 ‘화력’이 결정한다. ‘노동엠'(노동하는 에미)이란 자조적 표현을 쓰는 팬들은 ‘음악방송 1위’ 등의 성적을 안기기 위해 음원을 무한 스트리밍하고, 투표하고, 멤버별 여러 버전이 동시에 출시되는 앨범을 사들인다. 최근에는 ‘초동'(발매 첫 주 앨범 판매량) 경쟁도 붙었다. 앨범 안에 랜덤으로 들어 있는 멤버별 포토카드(포카) 모으기도 열풍이라, 포카 때문에 앨범을 수십 장씩 사기도 한다. K팝 앨범 판매량이 꾸준히 증가하는 숨은 비결의 하나다.
이 코어에서도 코어 팬들은 스타와 팬이 대면 혹은 영상통화로 1대1 대화하는 팬 사인회도 쫓아다닌다. 앨범 발매 시 많게는 40~50회 열리는 팬 사인회는 응모자격(팬사컷)이 앨범 구매량에 따라 주어지는데, A급 아이돌의 경우 팬사컷이 앨범 수십 장(수백만원)이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쯤 되면 팬질을 하고, 팬 사인회에 가기 위해 알바를 뛴다는 얘기가 무리는 아니다. 이처럼 큰돈을 쓰니, 돈 쓴 대상에게 돈값 하라고 요구하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는 일종의 ‘소비자 의식’이 싹튼다. 내 돈과 노력으로 인기를 얻었으니 딴눈 팔지 말고 본업에 충실해 팬에게 ‘보은’하라는 논리다.
얼마 전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이런 헤비 팬덤에 의존하는 K팝의 한계를 지적하며 이제는 라이트 팬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시장에서 큰돈을 쓰는 고객은 결국 헤비 팬덤이라는 현실적 딜레마가 있다. 무엇보다 헤비 팬덤을 만들고 부추긴 게 바로 K팝 기획사들이다. 그 끝에, 연애해서 죄송하다고 사과문을 쓰는 카리나가 있다. 가뜩이나 ‘K팝 위기론’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가운데 지속가능한 K팝을 논하기에 너무도 기이한 풍경이다.
사족. 지난 주말 MBC ‘음악중심’에서는 쟁쟁한 아이돌들을 제치고 5인조 버추얼 보이그룹 플레이브가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가상 아이돌 최초의 일이다. 여느 아이돌처럼 영상통화 팬 사인회도 여는 플레이브는 초동 50만 장이라는 진기록도 세웠다. 가상 아이돌에게도 돈 쓰는 코어 팬덤이 형성된, 디지털 시대의 놀라운 초상이다. 이런 가상 아이돌들은 열애설 등으로 문제를 일으킬 일도 없으니, 기획사들은 구미가 당길 듯하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