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렬의 공간과 공감] 부득이한 한중합작, 동관왕묘
무공과 충절의 대명사, 삼국지 촉나라 관우는 사후 왕으로 봉했다가 제후에서 성인으로 계속 격상되었다. 명나라 말기에는 천신의 경지에 올랐고, 그의 사당은 무묘(武廟)로 격상돼 공자의 문묘에 견주었다. 임진왜란에 원군으로 참전한 명군(明軍)은 수호신 관우의 사당을 1598년 한양의 남산 남록에 세웠다.
여기에 더해 본격적인 대규모 관왕묘를 세우라고 조선 조정을 압박했다. 아직 전쟁 중으로 민심과 경제는 바닥이었고 국왕도 겨우 민가를 징발해 임시 궁궐로 삼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해방군인 명군의 요청을 외면하지 못해 궁핍한 재정을 짜내 1601년 흥인문 밖에 동관왕묘를 완공하게 된다. 현재 동묘공원이라 부르는 곳이다. 원군은 왔으나 원조는커녕 수탈이 있었다.
동묘 건립을 강요하면서 명군은 “(설계 등) 중요한 것은 명의 제도를 따르되 목수와 미장이는 반드시 조선 장인이 담당할 것”으로 지정했다. 동묘 정전은 참배실과 봉안실 두 건물을 합친 독특한 형식이다. 두 공간은 一자형 지붕과 丁자형 지붕이며 이를 하나로 합쳐 工자형 지붕이 되었다. 조선에는 유일하나 명나라에 흔했던 건물 형식이다. 전면 전체를 홍살 창호로 꾸미고 측면과 배면은 두꺼운 벽돌벽을 쌓았다. 이 역시 중국식 구성이다. 그러나 지붕의 곡선이나 장식, 단청 기법 등은 여지없는 조선식 기법이다. 부속 건물인 동무와 서무, 내삼문과 외삼문에도 한국과 중국의 기법들이 섞여 조선 유일의 한-중 합작 건축이 되었다.
민심은 흉흉했다. “관묘 건립은 명이 건의한 부득이한 일”이었으나, 전후 경제에 극심한 폐해를 가져왔다고 사헌부는 비판했다. 한때 동묘는 방치되었으나 병자호란 후 반청존명의 시류에 격이 높아졌다. 망국기의 조선 왕실은 관우신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 서울의 남·동·북·중에 관왕묘를 건설했다. 1909년 동묘에 합사하고 나머지를 철폐했다. 이국적인 풍취의 동묘에는 조선과 명, 청과 일본 등 동아시아 격동의 외교사가 얽혀 있다.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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