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 보이스] 요조숙녀 프로젝트
돌이켜보면 ‘요조숙녀’라는 말 자체가 어찌나 촌스러운지 모르겠다. 찾아보니 요조숙녀의 요조는 ‘그윽할 요’에 ‘정숙할 조’. 한 마디로 군자의 짝에 걸맞은 깊고 그윽한 심성을 가진 맑은 여성이라는 뜻이다. 나는 남자 집안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안달복달했던 시절이 수치스럽다. 나고 자란 우리 집과도 원만한 합의를 보지 못했는데 도대체 어떤 헛꿈을 꾼 건지 모르겠다. 있다가도 없어지는 남자친구들 대신 항상 내 곁을 지켜주는 다른 숙녀(?)들에게 잘해야 한다는 후회가 따를 뿐이다. 매년 실패로 돌아간 ‘요조숙녀 프로젝트’는 결국 돈을 내서라도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은 흑역사로 남았다. 진짜 교훈은 헛발질에서 온다. 나는 요조숙녀 프로젝트로 인해 내가 거의 원시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절제란 묘한 것이다. 욕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으면 재채기처럼 쌍욕이 나왔다. 숙녀에게 술과 담배가 웬 말이냐? 자문하다 보면 바로 그 행위만이 사는 이유처럼 느껴졌다. “코끼리를 절대로 떠올리지 말라”는 지시가 코끼리에 대한 맹목으로 이어지는 것과 비슷했다. 가끔 태초의 여자 웅녀가 떠오르기도 했다. 여자가 되기 위해 동굴에서 100일간 쑥과 마늘을 먹었다는 광기의 곰…. 까마득한 설화 속 행동이 어쩐지 나와 겹쳐 보였다.
특히 외모 가꾸기는 너무 힘들어서 불쾌할 지경이었다. 애초에 나는 키나 골격, 손발이 평균보다 커 범용 사이즈에 맞추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다이어트를 하고 또 해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손재주가 없으니 화장이나 머리 만지기도 재미없었다. 결국 대충 예뻐지는 데 이토록 긴 시간과 비싼 고통값을 지불하느니 생긴 대로 두는 게 ‘가성비’가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건 타인에게 미소 짓는 상냥한 여자가 되겠다는 다짐이었다. 내가 상냥해지면 상대방도 상냥할 줄 알았건만 실상은 반대였다. 세상에는 타인의 양보와 배려를 공짜 물티슈처럼 뽑아 쓰려는 인간으로 가득했다. 방긋거리는 ‘예스 걸’에게는 조악한 평화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내게 “너는 너무 가식적이야”라고 했을 땐 머리 뚜껑이 천장까지 치솟는 기분이었다. 돌아보면 그 사람은 재수 없을지언정 틀린 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도 당시의 내 삶은 성질 팍팍 부리고 살 때보다 초라해 보였다. 요조숙녀 프로젝트는 매년 비슷한 깨달음을 거친 후 봄이 오기도 전에 폐기됐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좋은 여자가 되기 위한 노력은 왜 나를 실패한 여자로 만드는 걸까? 여자로서 사랑받으려는 내 모습은 왜 이리 사랑스럽지 않을까?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린 날에 던진 우매한 질문의 답을 알 것 같다. 온갖 무리수를 둬 애초에 좋은 여자, 사랑스러운 여자가 된들 수혜자는 내가 아니다. 누구의 무엇이 됨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존재감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좋은 여자’라는 건 어쩌면 일종의 서비스명일지도 모르겠다. 나 아닌 모든 이가 나의 인내를 누리도록 세상에 내놓는 일이니 말이다. 나는 결국 무료 봉사에 흥미가 없기에 망한 셈이다.
그러나 최근의 내 다짐은 결국 요조숙녀 프로젝트와 닮아 있다. 천박한 말 좀 그만하기, 술 · 담배는 물론 배달 음식과 쇼핑과 SNS 끊기, 주변인에게 친절하기 등등. 그래도 예전처럼 숨 막히지 않는 이유는 목표가 변했기 때문이다. 좋은 여자 말고 더 나은 내가 되기. 그렇게 생각하니 매번 반복되는 실패도 온전해지는 과정의 일부 같다. 나는 여전히 누구네 엄마 아빠의 좋은 며느리는 못되지만, 대신 우리 엄마 아빠의 좋은 딸이 되고자 부지런히 정진한다. 이루지 못한 가정 대신 나만의 단칸방을 쓸고 닦으며 단란한 하루를 보낸다. 32세가 되도록 정숙하다는 얘긴 한 번도 듣지 못했지만 아무 이상 없다.
정지음
싫은 것들을 사랑하려고 글을 쓰는 1992년생. 〈젊은 ADHD의 슬픔〉을 써 브런치북 대상을 수상했으며, 첫 소설 〈언러키 스타트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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