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이 빈곤을 부른다…‘가난’ 본질 탐구 [홍기훈의 ‘세계를 바꾼 경제학 고전’]

2024. 3. 1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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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빈곤의 종말

‘빈곤의 종말’을 논의하려면 책의 저자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저자 제프리 삭스는 경제학계의 유명 인사다. 현재 생존해 있는 경제학자 중 가장 유명한 10인을 뽑는다면 삭스는 꼭 포함돼야 할 정도로 유명하고 업적도 많은 경제학자다. 혹자는 폴 크루그먼, 로렌스 서머스, 제프리 삭스를 ‘경제학계의 3대 슈퍼스타’라고 부르기도 한다.

2006년 필자가 팀의 막내로 일하던 시절, 제프리 삭스의 세미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한 필자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며 팀장이 초청장 한 장을 써줬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강의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삭스가 강단에 오르려고 중앙 통로를 지나는데 참석자들이 웅성거리며 연예인 보듯 일어서서 까치발을 하고 그의 얼굴을 보려 하던 장면은 생생하다.

삭스는 재미있는 스토리를 많이 갖고 있다. 1976년 하버드 학부 경제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석사 그리고 박사 학위를 4년 만에 받았다. 하버드에서 교수 경력을 시작하는 학자들의 모임인 ‘Harvard Society of Fellow’에서 아직 박사 과정에 있던 삭스를 모임에 초대할 정도로 촉망받는 학생이었다. 1980년 하버드대 조교수 임용, 1982년 하버드대 부교수 승진, 1983년에는 만 28세에 하버드대 최연소 정교수가 됐다. 이 정도면 하버드에 뼈를 묻어야 할 것 같은데, 2002년 컬럼비아대로 이직했다.

그는 하버드 재직 시절, 일본 마사코 황후의 학사 졸업 논문 지도 교수기도 했다. 물론 황후가 되기 전 이야기다. 삭스는 2004년과 2005년 ‘타임’지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2년 연속으로 선정됐으며 ‘뉴욕타임스’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라고 평했다.

그는 러시아, 폴란드, 몽골, 슬로베니아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시장 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데 자문 역할을 하면서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볼리비아 대통령 자문역을 맡으면서 볼리비아가 직면했던 40000%의 인플레이션을 10%대로 끌어내린 업적으로 유명하다.

1980년대, 1990년대 대외 채무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개발도상국과 사회주의 국가들을 자문하며 종횡무진 활약하던 삭스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목격한다. 삭스는 당시 IMF가 위기에 처한 개발도상국에 내린 고금리 처방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2002년에는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의 경제특별자문으로 임명됐다. 특별자문으로 그는 인류의 공동 발전과 번영을 위한 협력 포럼인 UN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입안하고 실행했다. 이 과정에서 전 세계 빈곤 국가들이 왜 가난한지 연구하고 분석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빈곤의 종말’은 삭스가 UN의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 축적한 자료와 분석을 전 세계에 퍼트리고 가난한 국가들의 빈곤을 종식시키고자 쓴 그의 역작이다. 사회주의 국가들과 경제위기에 빠진 국가들을 자문하면서 저자가 축적한 경험과 지식, 그리고 인류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저자가 UN에서 기울인 전 지구적 노력의 결실이 바로 이 책이다.

제프리 삭스
방대한 사례, 위트 넘치는 문장의 신랄한 비판

일단 이 책은 재미있다. 구성 자체가 저자의 정책 자문 경험을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형식이다. 어투가 독자 친화적이고 읽기도 편하다. 저자의 확신이 넘치는 자세와 서슴없이 내뱉는 비판이 통쾌하다. 강한 어투와는 반대로 설명은 자세하고 친절하다.

책은 저자가 경험한 수많은 사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5장은 볼리비아, 6장은 폴란드, 7장은 러시아, 8장은 중국, 9장은 인도, 10장은 아프리카, 11장은 이라크의 예시가 나온다.

이런 흥미로운 사례들에 함몰돼 재미있게 책을 읽다 보면 어느덧 ‘빈곤 종말을 위한 현장 해결책’이라는 제목의 12장을 마주하게 된다. 이어지는 13장, 14장 그리고 15장에서 삭스는 국가가 빈곤을 이겨내고 자본을 축적하는 방법은 ‘빈곤의 사슬을 최대한 빨리 끊어내고 자립 경제의 사다리에 올라타는 것’이라는 명쾌한 답을 내린다.

삭스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프리카의 거버넌스가 나쁜 이유는 아프리카가 가난하기 때문이다(Africa‘s governance is poor because Africa is poor).”

정부의 부패와 전근대적이고 퇴행적인 문화적 규범이 아프리카를 가난하게 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가 가난하기 때문에, 정부가 부패하고 전근대적이고 퇴행적인 문화 규범이 판을 치는 것이라는 의미다.

결론적으로 삭스는 한 국가의 경제적 실패는 자연과 지리적 환경, 대외 채무를 비롯한 재정적 부족, 무역에 악영향을 미치는 지리적 문제, 혁신의 부족, 과다한 인구와 같은 수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실패한 국가는 너무 가난해 미래를 위해 투자돼야 할 자본을 축적할 수 없기 때문에 빈곤을 벗어날 수 없다고 덧붙인다. 즉, 빈곤 그 자체의 함정이 바로 대부분 가난한 국가들이 경제 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는 의미다.

빈곤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필요함을 알려준 책

책은 2005년 12월 30일 발간됐고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그리고 선진국 사회에 커다란 메시지를 던졌다. 빈곤을 끝내기 위해 개발도상국에 더 많은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는 그의 논리는 수많은 사회 운동가를 그의 팬으로 만들었다. 많은 이가 열광했다. 그리고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통해 국제사회 원조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던 UN 또한 이에 호응했다. 선진국의 선한 의도를 원하는 세계의 수많은 이들이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책에 쏟아진 관심과 찬사 그리고 호응에 반해 실질적인 국제 정책적 변화는 미미했다. 이유는 자명하다. 개발 원조를 결정하는 세계의 의사 결정권자들은 개발 원조가 실질적으로 빈곤을 구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삭스는 통치의 실패는 빈곤의 원인이 아닌 결과라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일 수도 있으나 통치의 실패로 인해 개발 원조자금이 효과적으로 쓰이지 못하고 빈곤에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매우 많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삭스의 주장은 원조를 통해 상황이 개선된다는 것 또한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책은 이런 비판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런 관점에서 몇몇 사람은 돈을 뿌려 빈곤을 퇴치하고자 하는 삭스의 생각을 담은 이 책은 현실 감각이 부족한 학자의 순진함이 낳은 산물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엄청난 관심과 호응, 찬사와 열광 그리고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비판까지, 책에 대한 반응은 분명 엇갈린다. 그러나 이 책이 인류에게 공헌한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 책 출간 이후 우리는 빈곤 문제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심각하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빈곤 국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이들을 위한 전 지구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알려준 책으로서 의미가 크다.

홍기훈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경제학 박사)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49호 (2024.03.06~2024.03.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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