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피알·루닛…유니콘 뒤엔 ‘큰형’ 있었네 [BUSINESS]
장면 2. 지난해 11월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는 ‘신한 퓨처스랩 데모데이 2023’이라는 행사가 열렸다. ‘신한 퓨처스랩’은 2015년 출범한 신한금융그룹의 스타트업 육성기관이다. 지난해 기준 총 390여개의 스타트업을 육성했고 약 750억원을 투자했다. 어느덧 9기 스타트업을 선발하는 자리였는데 이례적으로 진옥동 신한금융그룹 회장이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진 회장은 “지난 8년여간 수많은 스타트업이 기업가치를 끌어올리며 성장했고 신한금융그룹과 협업 사례만 230여건에 달했다는 점을 높이 산다”며 그 덕분에 금융지주사 산하 창업 지원기관 중 아기 유니콘(기업가치 1000억원 미만이면서 창업진흥원의 예비 유니콘 육성 사업에 선정된 기업) 최대 배출(20건)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진 회장은 “신한금융은 앞으로도 ‘고객 중심’이라는 목표를 향해 스타트업의 혁신 여정을 함께하는 든든한 동반자가 되겠다”고 강조했다.
금융지주회사는 은행 등 대형 금융사 위주로 사업을 전개하는 금융 분야 대기업이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룹 차원에서 다양한 스타트업에 전사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며 투자·육성하는 사례가 적잖다. 신한금융그룹은 9년 남짓 오랜 기간 동반 성장해왔다. 금융지주사가 키운 스타트업 중 초기 투자 후 2배 이상 기업가치가 커진 곳, 또 이들과 협업하면서 혁신 서비스를 만든 사례를 모아봤다.
신한금융 ‘루닛’ 통 큰 투자 눈길
신한금융그룹은 상장사 ‘루닛’ 얘기만 나오면 흐뭇하다. AI(인공지능) 열풍이 불기 직전인 2019년 의료 AI 스타트업으로 당시 비상장사였던 루닛에 신한금융투자(현 신한증권)가 주도해 150억원 투자를 성사시켰다. 이후 루닛은 국내외 의료 현장에 AI 의료기기, 영상판독 솔루션을 정착시키면서 ‘돈 버는 AI’ 회사로 기대에 부응했다. 그 덕에 2022년 상장에 성공했다. 상황은 이후 더 드라마틱하다. 챗GPT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지난해 루닛 주가는 불기둥을 뿜었다. 루닛은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액이 250억8000만원, 영업손실 422억원이었지만 전년 대비 매출액은 80.9% 증가, 영업손실은 전년 대비 16.7% 감소하는 등 실적 개선세도 뚜렷하다. 루닛의 시가총액은 지난해 9월 한때 2조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신한금융그룹 관계자는 “AI 열풍이 불기 전부터 의료 분야로 특화한 AI를 고도화할 수 있는 스타트업이라고 보고 투자했는데 상장 전 구주 일부 매각, 상장 후 매각 등으로 신한금융그룹은 4년간 펀드 내부수익률(IRR) 연 10% 이상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나금융그룹은 상장사 ‘마음AI’의 초기 투자사로 유명하다.
마음AI의 전신은 마인즈랩. 2014년 공인회계사로 삼일PwC컨설팅에서 파트너로 일하던 유태준 대표가 AI와 빅데이터 시장 성장 가능성을 보고 창업한 회사다. 마인즈랩은 종합 인공지능 서비스 전문기업으로 자체 보유한 AI 기술, 엔진을 통해 AI와 AI 휴먼 서비스를 제공한다.
마음AI는 2017년 하나은행의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인 ‘원큐애자일랩’에 선발됐으며 이를 계기로 하나은행에서 마음AI에 10억원을 투자했다. 이후 하나은행과 협업이 강화됐다. 마음AI는 2018년 하나은행의 인공지능 금융 서비스인 ‘HAI(하이) 뱅킹’ 서비스 구축에 참여, 고객이 인공지능 금융 비서와 음성·텍스트로 대화하며 계좌이체, 상품 가입, 추천, 환전, 해외송금을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실증 사례 덕에 마음AI는 2021년 11월 코스닥 시장 상장에 성공, 국내 대표 AI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KB금융그룹은 또 다른 AI 기업 ‘제이엘케이’에 투자, 상장까지 여정을 함께했다. 자회사 KB인베스트먼트가 2015년 발굴해 초기 투자했던 이 회사는 시리즈A(Series A) 투자부터 시리즈C까지 모두 참여했다. 제이엘케이는 2019년 상장에 성공했다. 상장 직전 KB금융그룹 연합(KB솔리더스 글로벌 헬스케어펀드, KB우수기술투자조합)이 보유한 지분율만 17%대에 달했을 정도. 이후 부분 엑시트(자본 회수)를 했지만 제이엘케이 일부 지분은 계속 보유 중이다. 제이엘케이도 의료 AI 분야 수혜주로 부각되며 최근 주목받고 있다.
차기 IPO(상장)를 노리는 대어 중에 금융지주사 손길을 거친 곳도 수두룩하다.
우리금융지주는 ‘토스’로 유명한 비바리퍼블리카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2013년 8월 치과의사 출신 이승건 대표가 설립한 이 회사는 주력 송금 서비스 앱 ‘토스’로 차별화했다. 이후 은행, 증권, PG, 금융상품 소개 등으로 사업을 확장한 한국 대표 핀테크 회사로 성장했다. 우리벤처파트너스(당시 KTB네트워크)는 2015년 시리즈B 이후 3차례에 걸친 폴로온(Follow-on·후속) 투자를 집행했다. 이 회사의 마지막 투자 유치 때 기업가치는 9조원을 넘겼고 상장이 성공하면 이보다 가치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하는 분위기다.
우리금융지주가 또 하나 기대하는 IPO 기대주가 있다. 프리미엄 K뷰티 브랜드 ‘달바’로 유명한 비모뉴먼트다. 비모뉴먼트는 네이버, 글로벌 컨설팅 회사 ADL, AT커니 등에서 일한 바 있는 반성연 대표가 2016년 창업한 회사다. 유명 화장품 기업 사업 전략 컨설팅을 하다 프리미엄 ‘비건(식물성)’ 화장품이 국내외 시장에서 비어 있다는 것을 보고 독립했다. ‘달바’라는 이름은 최상급 화이트 트러플이 생산되는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자락에 위치한 ‘알바’라는 지역에서 따왔다. 식물성에 확실한 효능까지 더한 화장품을 선보이면서 2019년 233억원이던 매출액을 2022년에는 1452억원까지 끌어올렸다. 영업이익률 3%대에서 10%로 끌어올려 이제 상장 혹은 대형 M&A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우리금융지주는 산하 우리벤처파트너스를 통해 비모뉴먼트 최대주주가 됐다. KTBN 13호 벤처투자조합 16.15%, 우리벤처파트너스의 또 다른 펀드인 KTBN 16호 벤처투자조합이 3.0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금융지주 관계자는 “에이피알 상장 후 K뷰티 성장 기대감이 큰 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지드래곤 소속사엔 신한·우리 동거
여러 금융지주 계열이 동시에 투자한 스타트업 중 상장을 앞두고 있는 회사도 있다.
신한금융그룹은 하나금융과 함께 에이피알 상장에 일조했다고 자평한다. 2017년 당시 그룹사 신한벤처투자 명의로 투자했는데 현재 일부 지분은 매각하고 상장 후 록업 기간이 풀리면 매각도 준비 중이다. 신한금융투자 역시 하나벤처스와 같이 초기 투자 원금 대비 10배 이상 차익을 거둘 것으로 기대한다.
지드래곤 소속사로 유명한 갤럭시코퍼레이션도 최근 상장 절차에 돌입하면서 일부 금융지주 사이에서는 기대감이 크다. 갤럭시코퍼레이션과 자회사 페르소나스페이스는 신한은행, 신한캐피탈, 신한투자증권 등 신한금융그룹 계열 회사(100억원)와 KB인베스트먼트 등 KB금융그룹 계열이 투자에 참여한 상황. 누적 투자 유치 금액은 약 700억원이며 지난해 상반기 기준 기업가치는 약 5000억원에 달한다. 넷플릭스 예능 중에서는 전 세계 1위를 차지한 ‘피지컬: 100’ 제작사로도 유명한 이 회사는 슈퍼 지식재산권(IP)과 기술 융합을 기반으로 미디어, IP, 커머스, 테크 등 크게 4가지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또 다른 콘텐츠 회사이자 상장을 추진 중인 ‘와이낫미디어’ 역시 신한과 우리에서 일찌감치 육성한 스타트업으로 유명하다. 2016년 방송 PD 출신 이민석 대표가 콘텐츠 기업으로 설립해 모바일, OTT 시청 환경에 맞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미스틱’ ‘나빌레라’ ‘이 구역의 미친X’ ‘구필수는 없다’ 등 다양한 히트작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강점. 신한금융그룹은 원신한(One-Shinhan) 커넥트 신기술투자조합 제1호 펀드를 통해 70억원을 투자했다. 우리금융도 우리벤처파트너스를 통해 초기 투자에 참여했다. 특히 신한금융그룹은 대표 앱인 ‘신한 쏠’ 마케팅 숏폼 영상을 와이낫미디어와 협업한 바 있다.
우리, 한인 유니콘 몰로코 장기 투자
몰로코?
국내에선 생소하다. 구글 출신 한인 IT 개발자 안익진 대표가 2013년 미국에서 창업한 애드테크(AI 기반 광고 서비스) 회사다. 마케팅 예산을 집행한 기업이 실제 어떻게 쓰였는지 알기 힘든 업계 현실을 보고 AI를 활용해 ‘내 광고가 어디에 언제 어떻게 노출’됐는지 실시간 확인 가능한 솔루션으로 차별화했다. 국내외 기업이 열광하면서 이 회사는 창업 8년 만에 유니콘 기업에 등극했다. 2020년부터 매년 매출이 5배 이상씩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투자 유치 과정에서 인정받은 기업가치는 20억달러(약 2조6400억원)에 달한다.
이런 몰로코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곳은 우리벤처파트너스. 지난해 몰로코 지분 일부만 회수했을 뿐인데도 원금 대비 30배가 넘는 성과를 기록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2022년 유니콘 기업에 등극한 메가존클라우드 역시 금융지주 계열의 지원을 톡톡히 받으며 성장했다. 메가존클라우드는 각 기업의 서버 이용을 AI를 활용, ‘최적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쓴 만큼 과금’하는 방식으로 차별화했다. 국내 대기업은 물론 해외 5000여 기업이 이 회사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2022년에 매출액 1조원을 넘겼다.
2019년 일찌감치 사업성을 본 KB금융지주 계열(KB증권, KB인베스트먼트)과 NH금융지주 계열(NH농협은행)이 직접 투자하면서 회사는 급성장 궤도에 들어섰다.
스타트업과 KB 전세금 안전 서비스
더불어 단순 투자를 넘어 협업하며 스타트업과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는 사례도 있다.
KB금융그룹이 대표적이다. KB국민은행이 프롭테크 스타트업 ‘빅테크플러스(2022년 KB스타터스 선정)’와 협업해 전세금 안전 진단을 돕는 KB부동산 ‘집봐줌’ 서비스를 시작한 사례가 대표적(2023년)이다. KB증권과 KB자산운용은 AI 자산관리 솔루션을 제공하는 ‘퀀팃(2022년 KB스타터스 선정)’과 함께 힘을 모아 투자자가 주식 포트폴리오를 직접 구성해 투자하고 관리할 수 있는 개인 맞춤형 투자 서비스인 ‘다이렉트 인덱싱’ 서비스를 시작하기도 했다(2023년). 이 밖에 KB금융지주는 생성형 AI 기업 ‘뤼튼테크놀로지스(2023년 KB스타터스 선정)’와 함께 그룹 생성형 AI TFT를 대상으로 생성형 AI 생태계 동향·기술자문을 진행하고 있다.
하나금융그룹도 모바일뱅킹 플랫폼인 ‘하나원큐’를 전면 개편하면서 스타트업 ‘아미쿠렉스’와 ‘차용증 송금’을 선보였다. 모바일뱅킹을 통해 지인 간 채무 관계가 발생했을 때 자금 이체와 동시에 온라인 차용증을 발급할 수 있는 서비스다. 국내 은행권 최초로 ‘하나원큐’가 얼굴인증 서비스를 도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AI 얼굴 인식 스타트업 ‘메사쿠어컴퍼니’와의 협업이 자리한다. 인공지능 스타트업 자비스앤빌런즈와는 제휴를 통해 ‘간편 급여이체 서비스’를, 금융위원회로부터 혁신금융서비스로 선정된 카사코리아와는 국내 최초로 ‘부동산 수익증권 거래 플랫폼 앱’을 선보였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49호 (2024.03.06~2024.03.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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