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역할은 집안일" 이런 헌법 아직도 못고치는 아일랜드, 왜
여성 역할을 돌봄과 집안일로 제한한 ‘낡은 헌법’을 뜯어 고치고, 가족의 개념을 확장하고자 한 아일랜드 정부의 시도가 좌절됐다. 8일(현지시간)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쳤지만, 투표 참여자 절반 이상이 반대하며 부결됐다. 수정안에 담긴 단어가 모호해 외려 더 큰 사회 혼란과 분쟁을 조장한다는 우려 때문에 아일랜드 국민 다수가 변화 거부를 택한 것이다.
세계 여성의 날이던 지난 8일 실시된 아일랜드 개헌안 국민 투표에서 투표자 과반이 개헌에 반대표를 던졌다. 개헌의 핵심은 크게 ‘가족’과 ‘돌봄’에 대한 의미 확장이다. 아일랜드에서 개헌은 국민투표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투표율과 관계없이 유효 투표수의 과반이면 통과된다.
결혼에 기반을 둔 가족 단위를 결혼하지 않은 커플이나 한부모 가정을 포괄하는 ‘지속성 있는 관계’로 확대하는 개헌안은 전체 투표자 중 약 67.7%가 반대했다.
여성(어머니)은 가정 내 의무를 소홀히 할 정도로 경제적 필요로 인해 노동에 종사할 의무가 없다고 명시한 조항을 폐기하고, 돌봄을 하는 구성원엔 다른 가족들도 포함돼야 한다는 수정안은 참여자 중 74%가 반대했다.
“단어 바꾸기 정도면 안 하는 게 나아”
개헌안 부결의 원인을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수정안이 담고 있는 단어가 모호해 의도치 않게 많은 법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우려가 대표적이다. 가령 가족의 정의를 확장할 때 사용한 ‘지속성 있는 관계’ 표현이 지나치게 광범위하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상속권 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예기치 못한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반대자들은 변경된 문구가 깊은 고민 끝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돌봄과 관련한 수정안에서도 여성에게만 부담을 지우는 것을 막기 위해 ‘가족 구성원들이 유대 관계에 따라 서로 돌봄을 제공하고 국가가 이를 인정, 지원에 노력해야 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선언적인 말일 뿐 돌봄을 제공하는 자를 보호하고, 서로 간 돌봄을 강제하는 데는 충분치 않다는 우려가 있다. 로라 카힐레인 리머릭 대학교 로스쿨 교수는 뉴욕타임스(NYT)에 “단어가 단어를 대체할 뿐이라 (수정안이 가결됐을 때) 법률상 의무로 실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돌봄의 부담을 여성에서 가족 전체로 확대함으로써 정작 국가가 돌봄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는 반발도 있다.
개헌안이 예상 외로 큰 차이로 부결된 것은 정부가 개헌 캠페인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카힐레인 교수는 “사람들은 혼란스러울 때 반대표를 던지고 변화를 거부할 우려가 훨씬 더 높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번 국민투표는 참여율 또한 저조했다. 44.4%로 역대 아일랜드 국민투표 중 가장 낮았다. 아일랜드는 국민 다수가 가톨릭 신자이며 서유럽 내 대표적인 보수 국가로 손꼽히지만, 앞선 2015년에는 동성 결혼 합법화를, 2018년엔 낙태 금지 폐지 국민투표를 놓고 모두 60% 이상 투표율을 보이며 통과시켰다.
김민정 기자 kim.minjeong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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