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007' 사상 최고... 노병은 죽지 않는다
[김성호 기자]
몇 년 전 배를 타고 항해를 하던 때의 이야기다. 영국 사우샘프턴 항에서 내려 6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딱히 사우샘프턴이나 영국에서 하고픈 게 없었던 나는 단 몇 시간의 상륙 동안 무얼 하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반드시 보고팠던 풍경이 불과 한 시간여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대로 런던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곧장 내셔널갤러리 34번방으로 향했다. 그곳엔 윌리엄 터너의 걸작 '전함 테메테르의 마지막 항해'가 걸려 있었다. 그 앞에 놓인 벤치에서 2시간을 머물다 돌아온 것이 내 영국여행, 또 런던여행의 전부다.
전함 테메테르는 1805년 있었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종군한 영국 전함이다. 유럽을 휩쓸고 있던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영국의 넬슨 제목이 격파한 바로 그 해전에서 공을 세운 전함인 것이다. 이 해전의 결과로 나폴레옹은 고립되고 영국은 제해권을 확보하며 브리튼 섬의 봉쇄를 풀어낸다.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영국이 대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니 오늘의 영국이 가장 자랑스러워할 한 순간이 바로 그 해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테다.
▲ 007 스카이폴 포스터 |
ⓒ 소니픽처스 |
제임스 본드와 전함 테메테르
위대한 전함의 마지막 순간을 아름답게 그린 윌리엄 터너의 그림은 적잖이 감동적이었다. 넬슨과 나폴레옹을, 범선과 증기선을, 옛것과 새것을, 일어나는 것과 가라앉는 것을, 그 모든 허망함 가운데서도 의미를 찾아내려는 예술가의 발버둥을 한 폭 그림 안에서 보았다. 런던에서의 추억이라 해봐야 내셔널갤러리 34번방에서의 2시간뿐이지만, 나는 그대로도 좋았다. 런던에서 그 벤치보다 멋진 풍경은 없으리라 여겼으니까.
시간이 흘러 나는 그 벤치를 다시 만났다. 이번엔 영화 속이었다. 그것도 그런 그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작품에서였다. <007 스카이폴>이 바로 그 영화다.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 분)는 Q라 불리는 병참장교와 그곳에서 만난다. 상급자로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라 알고 있던 그가 고작 20대 애송이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본드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 그를 보며 Q는 본드가 하는 일보다 훨씬 많은 일을 저는 집에서 잠옷차림으로 해낸다고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리즈 가운데 하나라 해도 무방할 테다. 1962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25편이 나온 <007> 이야기다. 영국 MI6 소속 첩보요원인 제임스 본드의 이야기로, 이언 플레밍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단순 계산해도 3년에 한 편씩은 만들어진 이 시리즈는 존폐의 위기를 수차례 넘겨가며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첩보물이란 평가까지 얻어냈다.
▲ 007 스카이폴 스틸컷 |
ⓒ 소니픽처스 |
시대 제일의 악당이 된 하비에르 바르뎀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하는 제임스 본드의 상대편엔 악역배우로는 이 시대 제일의 존재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하비에르 바르뎀을 캐스팅했다. 주디 덴치가 연기한 M이 마지막을 고한다는 점에서도, 아델에게 의뢰한 메인테마 'Skyfall'로도, 영국산 오락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5개 부문이나 노미네이트되었다는 점에서도 화제성이 큰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액션과 연출, 연기, 영상미 등에서 모두 완성도 높은 영화가 되었다는 점이 이 영화를 시리즈 중 제일로 기억하게 하는 것일 테다.
<스카이폴>은 대체 무엇이 다른가. 가장 중요한 이야기부터가 다르다. 오프닝이 강렬한 시리즈로 정평이 나 있는 작품답게 영화는 그 시작부터 강렬한 액션을 이어간다. 총격과 추격,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이용한 카체이싱은 급기야 기차 위의 혈투로 이어진다. 보통이라면 영화 막판 클라이막스에나 쓰일 법한 규모 있는 액션이 거듭되는 가운데 주인공 007이 저격을 당해 다리 아래로 추락하게 된다.
MI6에 의해 사망처리 된 007은 그러나 살아있다. 그는 본부에 제 생존을 알리지 않은 채 밑바닥 인생을 살아간다. 제가 격투 중임을 알고도 저격명령을 내린 상관 M(주디 덴치 분)에 대한 분노도 없지 않았을 테다. 총격을 당해 망가진 몸 상태 또한 영향이 있었을 테고 말이다.
▲ 007 스카이폴 스틸컷 |
ⓒ 소니픽처스 |
급변하는 세상, 지난 시대의 사람들
<스카이폴>은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캐릭터부터 전작들과 궤를 달리한다. 전작들에선 그래도 압도적인 매력을 자랑했던 그다. 그러나 이번 편에선 여러모로 늙고 쇠약해진 모습을 드러낸다. 40대 중반에 불과한 그가 현격히 노쇠한 모습으로 등장해 곳곳에서 제가 약해졌음을 일깨운다. 주름 가득한 외모는 물론 과거와 달리 투박해진 움직임이 모두 그러한데 몇 가지 장치까지 더하여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구시대 첩보원의 이미지를 빚어낸다.
이를테면 본드는 상하이로 건너가 작전을 수행한다. 그때 본드가 묵는 호텔방으로 문득 찾아든 여성요원이 있다. 본드는 마침 면도를 하려던 참, 그가 쓰는 외날면도칼을 본 여자가 그건 구식이라 말한다. 그러며 덧붙이길 구식이 최선인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 대사는 뒤에도 한 차례 더 반복된다. 본드가문의 고택인 스카이폴에서 적을 맞을 준비를 하던 때다. 본드 가문의 집사는 본드에게 남아 있는 무기가 얼마 없음을 알리며 제가 가진 몇가지를 풀어놓는다. 실망하는 본드 앞에 그가 꺼내놓는 건 바로 칼, 그러며 덧붙이길 옛것이 가장 좋을 때도 있단다.
▲ 007 스카이폴 스틸컷 |
ⓒ 소니픽처스 |
그럼에도 노병은 죽지 않는다
누군가는 첩보물이 매력 없는 장르가 되었다고 말한다. 정보기관이 기업집단의 사병이며 어디의 반군들과 또 어디의 조직폭력배보다 영화에 더 강하고 매력적으로 표현되는 시대가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현대전에서 드론 하나가 특수부대보다 더 큰 전과를 올리는 게 오늘의 전쟁이라고, 권총을 들고 현장을 뛰어다니는 구시대적 첩보는 이제 끝나버렸다고 말한다.
<007 스카이폴>이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럼에도 죽지 않는 노병의 가치다. 실제 현장에서 총을 쏘고 몸을 던지는 이의 역할이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장에 서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을 외면한 채 맞는 말들로 M을 몰아세우는 장관의 모습처럼, 새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의 가치를 외면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로부터 영화는 마침내 관객을 설득했고 시리즈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젖혔다. <카지노 로얄>이 막을 열고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시리즈가 <스카이폴>에 이르러 제 가치를 완연히 드러냈다. 그럼에 누구도 <007> 시리즈가 이쯤에서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전함 테메테르에겐 아직 할 일이 남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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