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도 모방할 것" 김병로의 근친혼 금지 예언…역사는 달랐다 [근친혼 논란]
“서양도 우리나라를 차차 모방해 오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100년, 200년 후가 될는지는 몰라도”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은 1957년 국회에서 근친혼 금지 도입 필요성을 역설하며 이같이 주장했다. 근친혼을 엄격히 금지하지 않는 해외에서도 한국 모델을 뒤따를 것이란 예측이다.
당시 법전편찬위원장이었던 김 전 대법원장은 1957년 11월 국회 본회의에서 “요새 개인주의 사상이 발달되며 ‘가족제도 없애야 한다’며 반기를 든 사람이 많지만, 당최 가족제도라는 것이 무엇인 줄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운을 뗐다. “개나 도야지나 다른 동물은 막 태어나서는 에미를 알고 동생을 알지만, 다 커 버리면 몰라서 참 불효 짓을 하고 동생도 소용없다” “지금 땐스(dance, 춤) 하고 미국 사람을 본 따려고 야단법석인데, 땐스는 남자나 여자나 어데서든지 만나면 정교를 하던 그런 시대에서 내려온 것” 등 탄식을 뱉을 때는 좌중에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연설 말미에는 “친족 간 혼인을 금지하게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가장 최고 문화로 내려온 것”이라고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유교 사상의 인(仁)을 강조하는 이 연설 끝에 민법 제정안은 ‘동성동본 혈족 사이 혼인 금지’(809조 1항), ‘8촌 이내 인척간 혼인 금지’(809조 2항) 등 근친혼 금지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1958년 입법돼 1960년 1월 시행됐다. 근친혼 금지를 관철한 게 김 전 대법원장이다.
그러나 근친혼 금지가 대세가 될 거라던 김 전 대법원장의 예측과 달리 이를 개정하기 위한 시도는 꾸준히 이뤄졌다. 이후 1977·1990년에도 두 차례 법 개정 시도가 있었다. 특히 1997년 7월 헌법재판소가 동성동본혼 금지가 헌법불합치라고 결정하면서 개정 논의가 본격화했다. 다만 유림 등의 극심한 반발로 개정시한(1998년 연말)을 한참 넘긴 2005년 ‘동성동본 혈족 사이 혼인 금지’ 조항을 ‘8촌 이내 혈족은 혼인 금지’(민법 809조) 등으로 축소하는 식으로 개정이 마무리됐다. ‘고조부를 함께하는 8촌 혈족은 근친’이라는 명제가 사회적으로 유효하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8촌 혈족은 근친’이라는 관념마저도 19년 만에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최근 법무부가 “근친혼 금지 범위를 4촌 이내로 축소할 필요가 있다”(현소혜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용역 결과를 보고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2022년 헌재가 8촌 이내 혈족의 혼인을 일률적으로 무효로 하는 민법 815조에 헌법불합치 판정을 하면서 2024년 12월까지 법 개정을 권고한 것의 연장선에서 발주된 용역이었다.
근친혼 규제를 얼마큼 완화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용역 결과가 알려진 직후 성균관과 전국 유림의 반발은 1997년 동성동본혼 헌법불합치 결정 때처럼 불붙고 있다. 이들은 지난달 27일 성명을 내고 “인륜이 무너지고 족보가 엉망이 되고, 성씨 자체가 무의미해지게 될 것”이라며 “가족을 파괴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지난 4일부터는 법무부 연구 용역 철회를 요구하며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출근 시간대 1인 시위 릴레이를 이어가며 대규모 집회도 검토하고 있다. 법무부는 “법 개정 방향이 정해진 것이 아니다. 신중하게 검토 중”이라는 입장이다.
여권에선 “앞으로 여론의 향배가 개정의 관건”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여권 관계자는 “아직 시간이 남은 만큼 여론 추이를 살피며 개정의 폭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지원·김정민 기자 yoon.jiw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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