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에 쇠말뚝, 땅밑엔 요새…첨밀밀 울려 퍼지는 '대만 연평도' [르포]
" 꿈에서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웃는 모습이 얼마나 달콤하던지요. " 오전 9시 정각이 되자 대만 진먼다오(金門島) 구닝터우 해안에서 1970년대 ‘아시아의 가희(歌姬)’로 불리던 덩리쥔의 대표곡인 톈미미(甛密密)가 흘러나왔다. 바다 건너편 중국을 향해서다. 대만 출신인 덩리쥔은 중국에서도 “낮에는 덩샤오핑, 밤에는 덩리쥔”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녀노소의 환영을 받았다. 1995년 세상을 떠난 그의 목소리가 거대한 방송벽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또렷하게 전해졌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우리처럼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리고 개인의 꿈을 이룰 수 있길 바랍니다”
‘대만의 연평도’ 진먼다오
대만 진먼다오는 중국 샤먼시에서 고작 4km 정도 되는 거리에 위치한 섬이다. 대만 본섬과는 200km 떨어져 있다. 한국의 분단 현실에 빗대 ‘대만의 연평도’로 불리기도 한다. 면적 151㎢로 울릉도 2배 정도 크기인 이곳은 1949년 중국 국공내전 막바지 중국국민당 최후의 보루였다. 전쟁 뒤에도 중국과 대만은 이곳에서 무려 21년간 서로를 향해 포탄을 날렸다.
진먼다오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문을 연 건 2001년 해운·항공·우편 교류를 허용하는 ‘소삼통(小三通)’ 정책이 시행되면서다. 기자는 지난 2일 샤먼 우퉁여객운수터미널에서 진먼다오행 여객선을 탔다. 오전 9시부터 1시간 혹은 1시간 30분 간격으로 하루 8편의 여객선이 두 섬을 오갔다. 정원 322명인 여객선에선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부분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짊어졌다. 말린 표고버섯, 호두 등 작은 섬에선 구하기 어려운 식재료들이 담긴 박스도 눈에 띄었다.
바다에서 바라본 양안의 풍경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대표적 관광도시인 샤먼은 빌딩 숲을 배경으로 관광객들이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해변을 따라 유람하는 관광 보트 뒤로는 바람을 탄 세일링 보트가 파도 위에서 넘실거렸다.
반면, 진먼다오 인근 바다는 삭막했다. 대만의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꽂힌 다단다오(大膽島), 얼단다오(二膽島) 등 부속 섬은 민간인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군사 기지다. 주민은 없이 상주 병력만 거주한다. 나무 뒤 웅크린 탱크도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30분여 물길을 헤치자 진먼다오를 이루는 두 섬, 샤오진먼과 다진먼을 잇는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 목적지인 수이터우항구가 있었다. 주변으로는 나무숲과 백사장이 보였다. 항구 인근엔 4층 이상 되는 건물이 없었다. 해변을 따라 고층 빌딩이 줄지어 솟은 샤먼과는 상반된 분위기였다. 입국심사서를 쓰고 터미널 밖으로 나서자 노란색 택시가 관광객을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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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요충지’에 숨은 지하 세계
군사적 요충지인 진먼다오 구석구석엔 지하 기지가 숨어있다. 그중 하나인 샤시바오(沙溪堡)는 샤오진먼 남서쪽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진먼다오의 부속 섬들과 샤먼을 한 번에 바라볼 수 있는 군사 거점이다. 산 위에서 바라보면 새 부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봉황 부리’라는 별명도 붙었다. 한때 대공포 40문과 기관총 50정으로 무장한 곳이다.
지하엔 총장 224m의 터널과 벙커가 갖춰져 있다. 유사시 곧바로 총구를 겨누기 위해서다. 현재 관광지로 탈바꿈해 누구나 드나들 수 있지만 유리창을 검게 칠한 일부 건물에 다가가자 대만 해순서(해경) 요원이 진입을 통제했다. 요원 뒤쪽으론 바다를 조망하는 망원경이 설치돼 있었다.
진먼다오 땅밑에 숨은 갱도는 모두 10여 개로 알려져 있다. 1961년부터 5년 동안 화강암을 뚫어 완성한 자이산(翟山)갱도는 폭 11.5m, 높이 8m에 달한다. 상륙정 42척을 동시에 정박시킬 수 있는 규모다. ‘진먼다오 지하세계’의 걸작으로 꼽힌다. 샤오진먼 동쪽 주궁(九宮)갱도는 내부 부두 5곳에 있는 선박을 바다로 이어지는 4개의 출구로 내보낼 수 있게 설계했다. 전쟁 당시 보급품과 자재를 신속하게 옮기기 위해서다. 한쪽에 마련된 전시실엔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둘러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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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엔 전쟁 흔적…“후대도 기억해야”
나비 모양 지형인 다진먼의 왼쪽 날개 상단엔 구닝터우(古寧頭)가 자리 잡고 있다. 국공전쟁 당시 중국과 대만의 격전지다. 중국이 임시 지휘소로 사용했던 베이샨구양러우(北山古洋樓)는 70여 년 전 상처를 몸에 새기고 있다. 1920년대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이다. 곳곳에 남아 있는 총탄 흔적으로 처참했던 현장을 증언하고 있다.
구닝터우 해변엔 파도를 따라 사람 키만 한 쇠말뚝이 박혀 있다. 중국군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만든 시설물인 ‘용치(龍齒)’다. 세월이 흘러 녹이 슨 용의 이빨들은 두 차례 대만해협 위기 당시 중국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에도 끝끝내 섬을 지켜낸 훈장과도 마찬가지다.
해변 옆으로 이어진 절벽 위엔 건물 3층 높이에 달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세워져 있다. 48개의 구멍이 뚫린 거대한 방송벽이다. 모든 구멍에 대형스피커를 달면 25km 밖까지 소리를 내보낼 수 있다. 대만의 선전방송이 샤먼은 물론 취안저우까지 닿을 수 있다.
현재는 스피커 개수를 크게 줄이고 하루 6차례 덩리쥔의 목소리를 방송하고 있다. 기자가 만난 방송벽 관리인은 “평화는 유지돼야 하지만 역사 건축물인 방송벽은 후대를 위해 남겨야 한다”면서 “우리가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사실을 우리의 아이들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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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혀갈까 바다 못 나가”…어민 한숨
진먼다오를 둘러싼 중국과 대만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달 이곳 앞바다에서 대만 해순서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중국 어선이 뒤집어지면서 중국 어민 2명이 숨졌다. 중국은 이를 빌미로 상시 순찰을 선언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함대를 조직하고 진먼다오 주변에서 훈련하는 영상도 공개했다. 대만 유람선을 멈춰 세운 뒤 검문하는 일도 벌어졌다.
기자는 샤진먼에 위치한 항구인 뤄춰위강을 찾았다. 한낮에도 바다에 나가지 않은 어선들로 항구 안쪽이 가득 차 있었다. 이곳 어민들은 인근 해역에서 황어(조기)를 잡으며 생계를 꾸린다. 한 어민은 “중국에 붙잡히면 대만 정부가 도울 방법이 없다”면서 “중국 해경에 끌려갈지 몰라 어민들은 최대한 나가지 않으려고 한다”고 요즘 분위기를 전했다. 그물을 손질하며 조업 준비를 하던 또 다른 어민도 “우리 터전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면서 “양안 갈등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싱가포르 연합조보는 중국 어민들이 양식과 비교하면 최대 100배 비싸게 팔리는 자연산 황어를 잡기 위해 대만 해경 감시를 피해 진먼다오 해역으로 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어족 보호를 위해 소량만 잡아올리는 대만 어민과 달리 중국 어선들은 큰 그물을 동원해 크고 작은 황어를 싹쓸이하는 방식을 취한다고 지적했다.
이날 기자가 나가본 진먼다오 앞바다에도 오성홍기를 단 중국 어선이 눈에 띄었다. 한 70대 어민은 “중국을 향해 큰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면서 “결국 이곳 주민들은 중국과 교류를 이어가야 살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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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통일 대업 흔들림 없이 추진”
어민 사망 사건 관련 협상을 위해 진먼다오를 찾은 중국 대표단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15차례 협상을 벌였지만 대만 측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최종 결렬을 선언했다. 사건 책임이 중국 어선을 들이받은 대만 해경에 있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만 측은 “대만 법체계에 부합하지 않는 요구를 해 합의가 불발됐다”면서 “매우 유감”이라고 반박했다.
4일 개막한 중국 최대 연례 정치행사인 '양회'에서도 중국은 대만을 향한 날 선 메시지를 내놨다. 리창 국무원 총리는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 업무 보고에서 “조국의 통일 대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 중화 민족의 근본 이익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대만 독립 분열 세력과 외부세력의 간섭에 반대한다”고도 밝혔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리커창 전 총리가 생전 마지막 전인대 업무 보고에서 언급한 ‘평화적 발전 촉진’, ‘양안 동포는 피로 연결돼 있다(血脈相連)’ 등 대만에 우호적인 표현은 한 해 만에 자취를 감췄다.
진먼다오·샤먼=이도성 특파원 lee.dos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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