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살이
@minhye.ko
클래식 타악기 연주자인 고민혜는 2016년 여름, 음악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한 이후 베를린에 9년째 머물고 있다. 전공인 클래식뿐 아니라 연극, 미술, 무용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이 젊은이에게 문을 활짝 연 분위기에 매료당했기 때문. “베를린의 가장 큰 매력은 자유로움이죠. 다양한 인종과 종교, 성별을 가진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살고 있음에도 개인적 취향을 존중하고 보이지 않는 경계를 지켜줘요. 개인의 자유를 표현해도 안전한 환경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제가 원하는 것과 진정한 모습을 더 편안하게 보여주는 방법을 배우게 됐어요.”
그가 사는 집은 지어진 지 100년 정도 된 독일식 건축물(Alt Bau)이다. 동네마다 열리는 크고 작은 플리마켓을 돌며 빈티지 가구와 조명, 오래된 포스터와 액자 프레임, 화병 같은 소품을 모았다. “흠집 나고 빛바랜 물건이라도 자신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흠마저 아름답게 보여요. 그런 물건으로 저만의 공간을 채워가는 게 좋고요.” 집 안 곳곳에 놓인 작은 조개껍데기나 돌은 고향인 제주에서 가져온 것. 작아서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지만, 고향에서 온 자연물이 자신과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정감을 얻는다. 도시 전경을 내려다보며 동백꽃차, 영귤차 등 제주에서 재배된 잎차를 우려 마시는 일은 소소한 행복.
나고 자란 곳을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에서 가져온 뚝배기, 할머니가 직접 짠 참기름으로 일주일에 한 번은 직접 밥을 지어 먹는데 그때 자아를 뼈저리게 느낀다고. “외로움도 이곳의 삶을 선택하고 짊어져야 할 책임의 일부분이죠. 저는 외로움을 내어주고 혼자만의 자유와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끄는 주체성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그게 제 타향살이의 자부심이자 기쁨입니다.”
@2oz.space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Btween Spaces’를 운영하는 이온즈는 20대 초반,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디자인 스쿨에 진학하면서 이 도시에 둥지를 틀었다. 브루클린 하이츠는 가족 단위의 거주자가 대부분이라 언제든 온정이 넘쳐나는 곳.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답게 19세기 중반에 지은 집들이 고풍스럽게 늘어선 동시에 신상 카페와 맛집 등 ‘힙 플레이스’까지 겸비했다.
“저는 새것보다 손때가 묻은, 추억이 담긴 것들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집과 작업실도 빈티지 가구들과 빈티지 홈웨어로 가득 채웠죠.” 꽤 늦은 나이에 타향살이를 시작한 편이지만, 삶의 방식은 제법 로컬화된 것 같다는 그는 전보다 많이 걷고, 남의 시선이나 삶의 방식에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됐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커피 테이블을 밥상으로 쓰거나, 빈티지하고 예쁜 의자들을 두고 바닥에 앉아 시간을 보낼 때는 여전한 ‘한국인스러움’에 웃음이 난다고. 좌식생활을 즐기기 위해 서구식 러그를 아끼게 된다는 아이러니도 물론이다.
아침에 눈뜨면 온종일 마실 보리차를 준비하고, 한국에서 챙겨온 다기에 차를 끓여 마시며 몸과 마음을 데운다. “제 삶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고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타향살이는 제게 행복이에요. 그래도 가끔 가족들과 친구들의 온정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마침 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지금, 한국은 설이겠네요. 북적북적함이 그립습니다.”
@eem.mr
넷플릭스, 마블, 워너브러더스의 콘텐츠를 작업하는 영화 CG 슈퍼바이저 미르. 한국에서 영화 CG 작업자로 근무하다 더 큰 프로젝트에 도전하기 위해 6년 전 VFX 회사가 많은 밴쿠버에 둥지를 틀었다. “대자연을 사랑하는 제게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도시예요. 다양한 이민자 문화와 음식을 접할 수 있고, 사람들의 태도도 대부분 친절하고 여유롭죠.”
숲 한가운데에 있는 기분을 선사하는 큰 창을 지닌 집은 100% 재택 근무를 하는 그에게는 직장이자 휴식공간이다. 낮은 가구와 오브제를 사용해 집의 내부와 외부가 자연스럽게 연결된 느낌이 들도록 꾸몄다. 모듈 가구를 활용해 사계절 다른 느낌으로 공간을 재배치하는 건 또 하나의 즐거운 취미. “한국인이 많은 지역이라 한식당과 식료품점 옵션이 다양해요. 거의 매일 한식을 챙겨 먹죠. 하지만 높은 물가 때문에 질 좋고 저렴한 가구와 물건은 한국에서 받기도 합니다.”
주말에는 꼭 야외 활동을 한다. 밴쿠버 생활 스포츠인 골프를 치거나, 가까운 호수에서 BBQ를 즐기는 방식. “이곳에는 또래 친구들이 겪는 사회생활 스트레스가 적어요. 사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권이라 제 성향에 맞는 업무가 가능했어요. 물론 사랑하는 이들의 대소사를 함께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아쉬움이지만요.”
@pinot.tokyo
도쿄의 운치있는 다다미방. 일본 건축과 미술에 관심이 많은 김경석은 도쿄에서 대학을 마치고 패션 디자이너로 활약 중이다. 그의 공간에는 섬세하고 오밀조밀한 감성이 한가득. 도쿄의 골목마다 즐비한 앤티크 숍에서 하나둘씩 모은 오브제들은 볏짚으로 짠 따뜻한 감성의 다다미 바닥과 그에 대비되는 검은색 가구들과 균형 있게 어우러진다. 포근하면서도 긴장감이 느껴지는 오묘한 공간.
“미니멀하고 타임리스한 가치를 추구해요. 시간이 흘러도 낙후되지 않는, 색이 바랠수록 깊이가 생기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죠.”그가 느낀 도쿄의 매력 또한 옛것을 잘 가꾼다는 점이다. 마을 곳곳에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포들과 대를 이어 운영하는 초밥집,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오랜 다방도 물론이다. 타국의 문화를 일본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음식, 패션, 잡화, 인테리어도 타향의 삶을 즐겁게 만드는 요소.
여전히 버릇처럼 남은 생활습관은 아침 대용으로 검정콩 미숫가루를 타 마시는 일이다. 일본에서는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꼭 한국에서 사오거나 부모님께 택배로 받곤 한다. “제 타향살이의 기쁨은 사소한 것에 새로움을 느끼고, 그에 뜨겁게 반응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평소 당연하게 여기는 것도 낯선 곳에서는 생경하게 느껴지니까요. 그런 크고 작은 자극에 노출된 이 느낌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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