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가 ‘정액’에서 시작됐다는 그들…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어떤 ‘사정(射精)’은 생명뿐 아니라 만물을 창조한다.
고대 인류 문명이 바라봤던 ‘정액’에 대한 관점이다.
현대 사회에서 ‘정액’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그리 기분 좋은 이미지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과거에는 달랐다. 고대 문명에서는 동서를 가리지 않고 정액을 만물의 근원이자 신성한 신의 선물이었다고까지 떠받들었다. 당시 정액은 ‘추앙’받아 마땅한 존재였다.
“정액 최대한 아껴라”…자위 금지 촉구
수메르 문명의 탄생 신화만 봐도 그렇다. 이야기의 얼개는 이렇다. 물의 신 ‘엔키’가 자위행위를 시작했다. 흥분이 절정에 달했을 때 우윳빛 액체가 메마른 땅에 떨어졌다. 갈라 비틀어진 비옥한 두 갈래 강이 됐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다. 우리는 이곳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부른다. 메소포타미아는 고대 그리스어로 강의 중간이라는 뜻. 우리말로 의역하면 ‘양수리’ 혹은 ‘두물머리’다.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창조의 신 아툼이 자위를 하자 공기의 신인 슈와 비의 신 테프누트가 태어났다. 생명의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자 대지는 온갖 생명체로 가득했다. 창조신의 정액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됐다는 웅장한 ‘세계관’이다.
철학의 나라 고대 그리스에서도 정액은 귀한 대접을 받았다. 남성을 남성답게 만드는 ‘물질’로 여겨서였다. 사실 고대 그리스는 여성 혐오 국가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오직 남성만이 피를 정액으로 만드는 열을 갖고 있다. 신체가 완전히 성장하기 전까지는 완벽한 영양분인 정액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좋다.”
사춘기 소년들에게 자위를 하지 말 것을 촉구한 것이다. 피타고라스학파들은 “정액은 뇌의 한 방울”이라고까지 얘기할 정도였다.
후대인 고대 로마의 철학자 갈레노스는 ‘체액설’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정액은 고환에 들어간 체액이 열로 인해 하얗게 변한 것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혼합물이기에 그대로 품고 있는 게 좋다고 여겼다. 과도한 성행위는 폐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 로마 청소년들은 넘치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몸을 비비 꼬았을 것이다.
‘정액’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는 ‘처방전’은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치료법’을 낳기도 했다. 고대 로마 의사인 소라누스는 사타구니에 납판을 넣고 차가운 주스로 고환을 식힐 것을 권했다. 몸의 욕구가 식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성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지만, 초반부터 모든 신도들이 같은 생각을 공유하지는 않은 것 같다. 4세기 기독교 종파 중 하나인 보르보라이트 신자들은 정액을 먹었다. 그들 스스로가 만든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 그들이 믿는 경전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막달라 마리아와 산에 올라 성관계를 가졌다. 사정한 후 예수께서 막달라에게 정액을 먹으라 일렀다. “이것이 당신이 살아가야 하는 방법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들은 경전을 믿었다. 그것도 열렬히. 예배를 드릴 때 그들은 난교를 했고, 서로의 정액을 먹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이라면서. 보르보라이트교의 이야기는 당대 기독교의 성인인 에피파니우스에 의해 전해진다. 그는 기독교를 괴이쩍은 방식으로 믿는 사교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쓴 저자다.
기독교 유럽 지배 이후엔 ‘죄악시’
자위는 물론 몽정까지 규제…성기 옥죄는 ‘정자 링’ 처방도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한 이후, 정액은 함부로 보여서는 안 될 물질로 여겨졌다. ‘성교 없는 사정’을 무엇보다 큰 죄악으로 여겨서다. 자위는 물론이고, 몽정까지 규제한 배경이다.
수도사들은 밤이 무서웠을 것이다. 잠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잠재적 본능이 고개를 들기 마련이다. 욕망은 그의 신체를 빳빳이 세우고 기어이 침대를 적신다. 아침마다 수도승들은 좌절한 눈빛으로 신을 찾았다. “저의 죄를 사하소서.” 그리고 그들은 금식과 고행으로 다시 ‘몽정’이 일어나지 않기를 빌고 빌었다.
기독교 성경에는 ‘사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구약 성경 레위기에는 “사정을 한 남자는 몸 전체를 깨끗한 물로 저녁까지 씻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기독교 성인들은 이를 근거 삼아 ‘사정의 자제’를 촉구했다. 동시에 ‘도덕적 밸브’를 조금 느슨하게 풀기도 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육체와 의지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는 말로 수도승들을 위로했다. 쉽게 말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 용서해주자’는 취지였다. 5세기 후반의 또 다른 교부도 “성적인 꿈을 꾸지 않고 몽정을 3번만 한 이는 훌륭한 종교인이 될 조건을 갖춘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몽정하지 말지어다’라는 채근은 계속됐다. 5세기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인 디오스코로스는 ‘금식하면 몽정이 줄어든다’고 생각했다. 과도한 영양 섭취는 체액의 축적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기독교에서는 ‘식욕’이 ‘성욕’과 연결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중세 유럽에서도 몽정에 대한 악마화는 계속됐다.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게임에 자주 등장하는 여자 악마 서큐버스를 아시는지. 당시 유럽에서 서큐버스는 ‘정액을 먹고 사는 악마’였다. 밤마다 사람들 꿈에 나타나 정액을 빼앗아 먹으면서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존재. 그만큼 사람들이 몽정을 불안하게 생각했다는 방증이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는 ‘산업혁명’이 태동한 때였다. 이성과 과학이 찬란하게 빛나던 아름다운 시절로 여겨지지만 실상 그렇지만도 않았다. 당시에도 자위와 몽정에 대해서만큼은 중세 교부들 생각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빅토리아 시대 의사들은 ‘잦은 성관계는 질병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성관계는 최대한 지양하고, 되도록 금욕을 실천하라는 것. 중세 수도승들이 신도에게 강조했던 것처럼. 일부 의사는 욕정을 호소하는 남성에게 ‘정자 링’을 처방했다. 자기도 모르게 발기할 경우 성기를 조르는 물건이다.
윌리엄 액튼이라는 교수는 질산은을 요도에 떨어뜨리는 수술을 감행하기도 했다. 감각이 마비되면 성욕도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자각몽’ 수련을 통해 꿈속에서라도 외설적인 꿈을 꾸지 않게 통제하자는 의사도 있었다.
이때의 지독한 믿음은 현대에까지 지속됐다. 1951년에 설립된 스코틀랜드의 한 협회는 “몽정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액’이 신성하다는 고대인의 믿음에는 일말의 근거가 있었던 것일까.
2016년 7월 한 논문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정액 냄새(A.K.A 밤꽃향기)의 주성분인 스퍼미딘을 과일파리에게 먹였더니 생명 연장 효과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꿈에도 알지 못했다. 섹스를 오래 하는 사람이 장수한다는 말에 진리가 담겨 있을 줄은.
미국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서는 ‘정액으로 만든 요리’라는 책을 판다. 정액 연어구이, 정액 마르가리타. 그 가짓수도 50개에 달한다. 하얀 액체를 입에 담는, 불순한 장면이 야동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정액을 추앙하는 고대적 세계관의 부활인가.
야무지지 못한 하체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정액이란 무엇인가.’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49호 (2024.03.06~2024.03.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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