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도와준 원정왕후? 당황스러운 '고려거란전쟁'

김종성 2024. 3. 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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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고려거란전쟁>

[김종성 기자]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으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된 역사적 인물로 원정왕후를 꼽을 수 있다. 이 드라마에서 현종 임금의 제1왕후인 원정왕후(이시아 분)는 제3왕후인 원성왕후(하승리 분)에 대한 경쟁심 때문에 군사 쿠데타를 도와준 어이없는 왕후로 묘사됐다.

드라마 속의 원정왕후는 반란군이 서북면 및 동북면 군사들의 반격을 받지 않게 도와준다. 전방 부대들이 개경에 오지 못하도록 왕후의 명령을 은밀히 내린다. 이것이 쿠데타 성사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대신, 그는 반군의 도움으로 제3왕후를 궁 밖으로 몰아내는 성과를 거둔다.

사극은 역사에 기반한 상상력의 산물이어야 한다. 그런데 <고려거란전쟁>의 이 같은 스토리 전개는 실제 역사와 동떨어져 있다. 원정왕후가 김훈과 최질의 반란을 도왔으리라는 상상력에 힘을 실어줄 만한 근거를 역사 기록에서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역사 기록에서 찾기 힘든 근거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
 
김훈·최질은 거란족 요나라의 군사적 압박이 계속되던 1014년 11월 25일(음력 11.1)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4개월 보름이 안 되는 1015년 4월 5일(음 3.14)에 현종이 서경(평양)으로 행차해 그곳 병력으로 김훈·최질을 제압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3년 뒤인 1018년 4월 23일(음 4.5)에 원정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쿠데타 진압으로부터 3년 뒤에 사망했으니, 만약 그가 정변에 연루됐다면 이 점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사망 뒤에 나타났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평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왕후는 그 전까지 현덕왕후로 불렸다. <고려사> 원정왕후열전에 따르면, 현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현종은 원정(元貞)이라는 시호를 부여하고 화릉(和陵)에 장사지냈다. 3년 전에 쿠데타를 도운 왕후라면 이렇게 우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현종시대의 역사를 담은 <고려사> 현종세가는 사망 당시에 원정왕후의 거처가 현덕궁으로 불렸다고 말한다. 이는 그의 거처가 김훈·최질 처형 이후에도 궁으로 불렸음을 의미한다.

왕족의 거처가 궁으로 불린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일이 원정왕후 사망 4개월 뒤에 있었다. 현종세가는 1018년 8월 30일(음 7.17)에 제3왕후인 원성왕후가 훗날 정종 임금이 될 아들을 낳자 현종이 어떤 방식으로 축하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종은 축하의 의미로 원성왕후의 거처를 원(院)에서 궁으로 승격시켰다. 이는 제1왕후인 원정왕후가 김훈·최질의 난 뒤에도 궁에 거처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준다. 반란에 연루됐다면 그의 거처가 현덕궁으로 불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원정왕후열전>에 따르면, 현종은 원정왕후 9주기가 되는 1027년에 의혜(懿惠)라는 시호를 별도로 추서했다. 왕권을 반군에 넘긴 왕후였다면 사후에 이렇게 대우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위상이 막강했던 원정왕후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
 
원정왕후는 상당히 신성한 위상을 띠고 있었다. 현종의 관심을 제3왕후에게 빼앗겼을 수는 있지만, 제3왕후는 물론이고 현종도 쉽사리 침해하기 힘든 거룩한 지위를 보유한 인물이었다.

제8대 주상의 배우자인 원정왕후는 태조 왕건의 증손녀이자 제6대 주상인 성종의 딸이었다. 왕족이 신성시되던 시절에 그의 위상은 전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딸인 제3왕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제3왕후가 현종의 마음을 차지한다 할지라도 원정왕후의 위상은 흔들리기가 힘들었다.

원정왕후는 성종의 정실부인인 문화왕후에게서 태어났다. 이 점에서 그는 제2왕후인 원화왕후와도 달랐다. 원화왕후는 성종의 딸이지만 후궁의 몸에서 출생했다.

원정왕후의 위상이 막강했다는 점은 그의 어머니가 왕씨였던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원정왕후의 어머니는 왕실 밖에서 왕실로 시집간 여성이 아니라 본래부터 왕실의 일원이었던 여성이다. 이 점 때문에도 원정왕후의 위상은 대단했다. 이런 왕후가 쿠데타를 도와 왕실을 위태롭게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원정왕후는 현종 못지않게 왕실 지분이 많았다. 그래서 굳이 현종의 관심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왕족의 삶을 이어나가는 데에 별 지장이 없었다. 그가 현종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쿠데타를 도왔다는 <고려거란전쟁>의 상상력은 그의 처지를 너무 무시하는 것이다. 물론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거는 왕족도 당연히 있었지만, 원정왕후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볼 만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
 
<고려거란전쟁>은 김훈·최질의 난이 원정왕후 덕분에 성공했다는 식으로 스토리를 전개했다. 원정왕후가 아니었다면 서북면과 동북면 군사들이 개경으로 몰려와 쿠데타군을 진압했을 수도 있다는 상상력을 보여줬다. 이런 상상은 당시의 실제 상황과 크게 괴리된다.

<고려사> 축약판이자 보충판인 <고려사절요>는 김훈과 최질이 "여러 위(衛)의 군대를 거느리고 난을 일으켰다"고 기술한다. '난을 일으켰다'에 해당하는 한자는 작난(作亂)이다.

김훈과 최질은 이 '장난'을 위해 '여러 위'의 군대를 인솔했다. '여러 위'의 한자인 제위(諸衛)는 '모든 위'로도 번역된다. 이는 김훈과 최질이 중앙군인 6위를 대체로 장악한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으리라는 판단을 가능케 한다.

영화 <서울의 봄>에도 묘사됐듯이, 1979년 12·12쿠데타 당시의 전두환·노태우는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이는 전·노의 반군이 서울을 빨리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김훈·최질은 6위를 대체로 장악한 것으로 보이는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래서 장태완 같은 장애물을 만날 이유가 없었다.

1994년 10월 29일 서울지방검찰청이 발표한 12·12사건 수사 결과에 따르면, 최규하 대통령은 12월 12일 초저녁부터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재가 요청에 시달렸다. 최규하가 쿠데타를 승인한 것은 13일 새벽 5시 10분이 지난 뒤였다. 최규하가 '사인 좀 해주시라'는 전두환의 압박을 그 오랜 시간 버텨낸 것은 전두환이 서울을 장악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과 무관치 않다.

이에 비해, 1024년 11월 25일의 현종은 꽤 신속하게 쿠데타를 승인했다. <고려사절요>는 "중지(衆志)를 거스르기가 조심스러워"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현종이 신속히 승인한 것은 11·25쿠데타 때는 장태완 같은 인물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반군에 맞설 정부군이 수도 개경에 없었던 것이다.

김훈·최질의 쿠데타가 성공한 것은 그 때문이다. 군주가 '사인할까 말까' 하고 고민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반군이 개경을 신속히 장악한 상태에서 거사가 일어났다. <고려거란전쟁>에서처럼 원정왕후의 조력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 반란이 개시됐던 것이다.

<고려거란전쟁>은 현종이 김은부의 딸을 더 사랑한다는 이유로 원정왕후가 앙심을 품고 쿠데타를 도왔다는 식으로 스토리를 전개했지만, 이런 상상은 실제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상력은 작가의 특권이지만, 이 경우에는 상상력이 역사에 대한 이해를 저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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