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나 널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열애설에 팬들 광분 왜
25년 전 H.O.T. 문희준과 베이비복스 간미연의 스캔들이 불거졌을 때 H.O.T. 팬들로부터 커터칼과 혈서를 받은 건 간미연이었다. 그러나 지난주 에스파 팬들로부터 협박 섞인 ‘시위 트럭’을 받은 건 열애설의 상대인 배우 이재욱이 아닌 카리나였다. 팬들은 왜 카리나에게 분노한 걸까.
지난달 27일 카리나와 이재욱의 열애설이 불거지자 양측은 “이제 알아가는 중”이라며 교제를 인정했다. 그러자 소셜미디어(SNS)에는 카리나 팬들의 실망과 분노 섞인 글들이 도배됐다.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 앞에는 중국 팬들이 보낸 ‘시위 트럭’까지 등장했다. 지난 5일 카리나는 결국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 연애한다고 사과까지 해야하는 아이돌 팬덤을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왔고, BBC 등 외신은‘악명 높은 K팝 문화’를 조명했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내 새끼’ 스타 만드는 양육자 팬
K팝 문화는 BBC의 지적대로 ‘악(惡)’할까? 최근 아이돌 열혈 팬들의 감정은 스타에 대한 동경보다는 자녀에 대한 ‘타이거 맘’의 애착에 가깝다. 카리나를 향한 팬들의 비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를 그 자리에 올려놓은 건 마이(에스파 팬덤)들이다”,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자랑스러운 가수가 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는 식이다. 한마디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정서가 깔려있다. 이른바 '양육자 팬덤'이다.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 국제학과 교수는 “요즘 아이돌 팬에게는 ‘내가 너를 열심히 서포트해서 1등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양육의 개념이 있다. ‘프로듀스 101’ 등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한 뒤에는 더욱 그렇다”며 “마치 부모들이 ‘내가 너를 좋은 대학 갈 수 있게 지원해줄 테니 그동안 공부에 전념하라’고 하는 개념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팬들은 신곡이 나오면 앨범 수백장을 구매하고 인기 순위를 올리기 위해 노래를 스트리밍하며 아이돌에 헌신한다. 팬들이 보낸 시위 트럭의 전광판 문구 “How dare you?(어떻게 네가 감히?)”에는 카리나가 이같은 희생을 배신했다는 원망이 담겼다. 카리나는 사과문에 “실망시키지 않고 더 성숙하고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 보여드리겠다”고 쓰며 팬들의 분노를 달랬다.
아이돌과 “밥 먹었어?” 메시지…가까워진 ‘TV속 여신’
팬과 아이돌의 관계 변화에는 급속도로 발달한 미디어 기술도 기여했다. 나은경 국민대 미디어·광고학부 교수는 논문 ‘미디어 팬덤의 심리학: 아무나 팬을 가진 시대, 숭배에서 친밀감으로’(2020)에서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미디어 소비자와 미디어 인물들 사이의 관계는 점점 더 복잡다단해지고 있는 데 반해, 그 본질에 대한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이해는 부족한 실정”이라고 짚었다.
TV 등 대중매체에서 일방향적으로 아이돌을 접해야만 했던 팬들은 이제 SNS에서 아이돌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이런 소통은 ‘버블(스타의 메시지를 1:1 채팅방으로 수신하고 답장할 수 있는 구독형 메신저)’ 등 팬 플랫폼으로 상품화됐다. 메시지를 자주 보내는 아이돌들은 ‘효자, 효녀 아이돌’이라며 입소문이 나고, 반대로 소통에 소홀하면 비난받는다.
카리나는 대표적인 ‘효녀 아이돌’ 중 하나였다. 수시로 ‘버블’로 소통했고, 그 덕에 ‘팬에게 잘하는 걸로 유명하고, 버블도 자주 오는’ 아이돌로 손꼽혔다. 그런데 연애를 시작한 시점부터 ‘버블’에 소홀해졌다는 지적이 나왔다. 배신감을 느낀 팬들의 ‘버블’ 구독 취소가 줄을 이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팬들의 과열된 반응은 개인의 사생활과 걸그룹으로서의 활동을 분리하지 못하는 문화지체 현상이 원인”이라고 지적하며 그 배경 중 하나로 이같은 팬 플랫폼을 짚었다. 그는 “일대일 서비스 제공은 잘못하면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돈으로 샀다는 오해를 줄 수 있다”며 “아티스트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엄청난 감정노동”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최근 K팝 시장에서 스타 탄생을 위한 ‘하드코어 팬’들의 화력은 필수가 됐다. 카리나의 열애 소식이 전해진 뒤 팬덤에서 나왔던 “돈은 팬이 쓰고 용서는 대중이 한다”는 조소에는 뼈가 있다. 아이돌에게 헌신하는 ‘코어 팬’과 가볍게 소비하는 ‘라이트 팬’ 사이에는 소비 시간과 돈의 규모에서도 줄어들 수 없는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지속 가능한 K팝의 발전을 위해서는 ‘열성 팬’들에게 의존하는 산업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규탁 교수는 “K팝 산업이 최근 5~6년 사이 대중적인 인기보다 충성도 강한 팬들에 의존하는 경향이 지나치게 높아졌다”며 “코어 팬의 돈과 시간을 담보로 인기를 얻는 산업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기획사에서 장기적인 차원에서 팬층을 넓고 다양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서인 기자 choi.seo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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