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리아 너마저” 발길 끊긴 이대앞·신촌 [핫플의 추락①]
높은 공실률에도 버티는 건물주…상권 노후화
저마다의 개성과 독창성으로 트렌드를 선도했던 서울의 대표 상권들이 추락하고 있다. 아기자기한 소품숍과 의류매장, 맛집들이 어우러져 핫플로 떠올랐던 일부 지역은 자영업자들이 치솟는 임대료 부담을 이기지 못해 주변으로 서서히 밀려난 것을 시작으로 상권 자체가 매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됐다.
사람들로 넘쳐났던 거리는 공실로 가득하며, 상권의 노후화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국민일보는 3회 기획보도를 통해 서울의 대표 상권으로 주목받았지만 지금은 과거의 활력을 잃어버린 곳들을 찾아 소개한다.
“무섭죠. 언제 저도 짐 싸게 될지….”
지난달 2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정문 앞. 이곳에서 44년째 맞춤 양장점을 운영하는 신모(66)씨는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가게들을 보면서 나도 언제 접어야 할지 몰라 불안하다”고 했다. 과거 패션의 성지로 불리던 골목은 한때는 중국인 관광객들로 가득 찼지만 지금은 옛 영광의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세로로 길게 늘어선 점포 60여곳 중 18곳은 비어있는 상태였다.
옆 동네 신촌 역시 과거의 명성을 잃은 지 오래다. 500m 길이의 연세로 주변 빌딩들 1층 점포는 텅빈 채 ‘임대’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4곳은 아예 건물 전체가 비어 있었다.
신촌과 이대 부근의 공실률이 높아지면서 두 곳을 아우르던 ‘청춘’이라는 키워드는 이제 옛말이 됐다. 가로수길(36.5%) 다음으로 서울에서 두 번째로 공실이 많은 동네가 됐기 때문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기준 신촌과 이대 부근 소규모 상가 공실률은 22%였다. 같은 시기 서울 평균 공실률(5.6%)의 4배였다.
이날 마침 연세대 졸업식이 있었는데 취재진이 만난 학생들은 졸업식이 끝난 후 연남동이나 홍대 쪽으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고 했다. 졸업생 A씨는 “1학년 때 있던 가게들이 지금은 거의 문을 닫았다”면서 “졸업식이 끝나면 가족들과 연남동에 가서 파스타를 먹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경영학과를 졸업한 B씨는 “평소에도 학과 친구들이랑 홍대 부근에 가서 주로 밥을 먹는다”며 “예쁜 카페도 훨씬 많아서 사진 찍기에 그쪽이 낫다”고 했다.
신촌에서 발길이 떠난 건 학생들만이 아니다. 대형 프랜차이즈들도 하나둘 문을 닫을 만큼 신촌은 상업성을 잃고 있다. 2018년 맥도날드 폐업은 신촌의 랜드마크가 사라진 대표 사례다. 윤모(40)씨는 “’맥날 앞’은 대학 시절 만남의 장소이자 신촌역 3번 출구 앞을 대신하는 대명사였다”면서 “2018년 폐업 소식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큰 충격이었다”고 했다. 2004년 아시아 최초로 이곳에 오픈하며 많은 주목을 받았던 크리스피크림도넛은 2017년 문을 닫았고, 올해 초엔 롯데리아도 폐점했다.
신촌의 몰락은 도심 젠트리피케이션의 전형적인 과정을 거쳐 진행됐다. 시작은 높은 임대료였다. 공인중개사 장원(34)씨는 “2013년을 기점으로 경의선 숲길과 연남동, 망원지구 개발이 시작되면서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낮은 쪽으로 자영업자들이 옮겨갔다”면서 “빈곳을 대형 프랜차이즈가 꿰차긴 했지만 임대료는 높고 오가는 사람은 없으니 얼마 안가서 신촌의 상권 자체가 같이 죽어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세대 송도 국제캠퍼스로 신입생들이 1년간 의무적으로 통학하기 시작한 것도 원인 중 하나다. 신촌 상권의 주 소비층 중 4000명 이상이 줄어들면서 유동인구 급락 폭이 더 커졌다는 평가다.
늘어나는 공실에도 임대료는 여전히 높다. 신촌역 출구 앞 40평짜리 건물은 보증금 3억원, 월세 1600만원으로 매물이 나와 있는 상태였다. 주변 공인중개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연세로 부근은 30평 기준으로 평균 보증금 2억~3억원, 임대료 1000만~2000만원 정도로 형성되어 있었다. 홍대와 연남동 상권에 밀리고, 코로나19를 겪으며 수요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신촌의 높은 임대료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올해 이화여대에 입학한 강모(20)씨는 “학교 앞이 제일 무섭다”고 말했다. 이화여대5길 골목 초입에 있는 상점 5곳은 모두 텅 비어 있었고, 정면으로 보이는 사거리에도 대형상가들이 모두 공실이었다. 두 개의 대형 공실 상가 주변엔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고, 건물 앞에 설치된 나무판자들은 부서진 채 방치돼 있었다.
‘몽땅 5000원’이라는 플래카드가 붙은 녹색 지붕 건물 앞엔 천들이 켜켜이 쌓인 채 버려져 있었다. 지붕위엔 널찍한 나무판자 3개가 바람이라도 불면 떨어질 듯, 끄트머리만 걸쳐진 채 바닥을 향해 걸려있었다. 이 상가의 오른쪽 골목은 한 블록 전체가 공실이 된 채 방치돼 있었다. 강씨는 “밤에 이 골목은 가로등만 희미하게 켜진다”며 “해가 지면 큰길로 나가거나 학교에 오래 있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신촌보다 더 심각한 이대 상권 추락의 이유 중 하나는 ‘책상머리 규제’의 부작용도 있다. 2013년 서울시는 이대 앞을 ‘쇼핑·관광 권역’으로 지정하고 의류와 이·미용 중심 거리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오히려 상권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다른 업종이 들어올 경우 건물 내 주차장을 필수로 만들어야 하는 규제도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카페나 음식점 같은 다른 업종은 이대 상권에 자리 잡지 못하게 됐다. 지역의 특성을 살리고자 만든 정책에 상권의 자율성은 제동이 걸렸다. 여기에 쇼핑 트렌드가 온라인 위주로 변하고 코로나19로 외국인 관광객이 감소하면서 이대 앞은 상권의 쇠퇴를 겪었다. 쇼핑·관광 권역 지정은 10년이 지난 뒤 지난해 3월에서야 해제됐다.
신촌과 이대 앞 일대 공인중개사들은 “공실이 발생해도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낮추지 않는게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대부분의 건물주가 임대료를 낮추면 건물의 자산가치가 떨어진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의 영향도 언급된다. 2018년 10월을 기준으로 이후에 계약된 건에 대해서 건물주는 1년에 5% 한도 내에서만 보증금과 월세를 올릴 수 있고, 세입자와의 계약 기간은 5년에서 최대 10년으로 늘어났다.
이 때문에 이대 부근엔 상가 자리에 오피스텔이 들어서면서 상권의 성격 자체가 바뀌고 있다. 일부 건물주는 새로운 상권으로 거리를 부활시키는 것보다 주거 시설 업종으로 바꾸는 게 낫다고 본다. 최근 5년간 이대 앞에 새로 생긴 오피스텔만 총 10곳으로 6000세대가 넘는다.
도시와경제 송승현 대표는 “임대료를 낮추면 건물주 입장에서는 단기적으로는 대출 상환이나 자산가치 등 다양한 영향을 받을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서울에 남는 골목은 없을 것”이라며 “신촌과 이대는 노후화된 건물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는 게 시급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윤예솔 기자 pinetree2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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