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정치인과 말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4·19혁명 이후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는 모습을 단독 보도한 경향신문 일화가 등장한다. 망명 전날인 1960년 5월 28일, 경향신문 편집국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내일 아침 이화장(이 대통령 사저)에 무슨 일이 있을 터이니 잘 지켜보라”는 제보였다. 이화장 앞을 밤새워 지키던 기자들은 다음 날 아침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이 대통령 차량을 쫓아가 그의 망명 현장을 상세히 보도한다.
64년 전 희대의 단독 기사를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찾아봤다. 1960년 5월 29일 석간신문이었다. ‘진짜 이런 일이 있었구나, 누가 제보한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기사를 읽던 차에 눈에 들어온 대목이 있었다. 당시 취재기자와 이 대통령의 문답이었다. 이륙을 앞두고 기내에서 쫓겨나던 기자는 “한시(漢詩)라도 한 수 남기지 않으렵니까”라고 묻는다. 이 대통령은 이렇게 답한다. “예까지 찾아와 주어 고맙소. 그러나 조용히 떠나고 싶소.”
이 대통령과 이 신문은 지독한 악연이었다. 1958년엔 정간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상호 격식을 갖춘 문답과 보도는 인상적이었다. 4·19혁명으로 독재의 권좌에서 내려와 쫓기듯 타국으로 떠나는 대통령의 심경은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과오와 별개로 그의 언론과의 대화엔 격이 있었다. 요즘 정치인에겐 찾기 힘든 모습이다. 질문하는 기자들을 잡상인 취급하거나 “저쪽(다른 당) 가서 물어보라”고 대꾸하는 정치인에게 한시를 청할 수 있을까.
4월 총선을 한 달 앞두고 쏟아지는 정치권 언사를 보면 60년 뒤 사람들이 신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우려되는 내용 천지다. 공천 문제를 놓고 불만을 토로하며 등장한 ‘피칠갑’ ‘썩은물’ 등의 단어는 자녀가 볼까 두렵다. 여야가 주고받는 초등학생 수준의 공방도 마찬가지다.
‘너는 0점’이라는 공격에 ‘너는 -200점’이라고 반박하거나, 상대방이 뭐 실수하는 거 없나 말꼬리 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애들 싸움만도 못하다. 배경엔 이런 자극적인 말싸움에 환호하는 극렬 지지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더 자극적으로 키우는 일부 SNS와 유튜버들도 막말 잔치 속에 잇속을 톡톡히 챙긴다.
국민 다수는 이런 식의 행태에 진절머리를 느끼고 있다. 한국갤럽이 최근 발표한 주간 정례 여론조사에선 ‘어떤 사람이 국회의원이 될까 걱정되느냐’는 질문에 ‘공익보다 사익 위하는 사람’(32%)이란 응답이 가장 많았다. ‘막말, 혐오 발언하는 사람’이 싫다는 응답도 18%나 됐다. 능력, 경험 부족한 사람(14%)보다 사익만 추구하고 막말을 내뱉는 정치인이 더 싫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선거에선 이런 인물들이 오히려 국회 문턱을 손쉽게 드나든다. 이번 총선에서도 여야에서 합리적 발언과 정제된 언어를 쓰는 초재선 의원 상당수가 공천 배제됐다. 과격한 공격수들은 상당수 살아 남았다. 문화 연구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저서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에서 “정당은 일종의 분노은행”이라고 진단했다.
사람들이 마치 예금처럼 분노를 정당에 맡기면 정당은 예금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분노를 키우고 증폭시키는 것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막말과 분노가 아니면 돌아가지 않는 구조가 된 한국 정치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적절한 해석은 없을 것이다.
김예지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은 얼마 전 비대위회의에서 ‘혐오 언어 퀴즈쇼’를 열었다. 김 위원은 ‘장애를 앓다’ 대신 ‘장애가 있다’는 표현이 바르며 눈먼 돈이나 외눈박이 의견, 절름발이 행정 같은 비하적 은유는 사용하지 말자고 했다. 그는 “이런 은유나 직유를 사용할 때 자기 이름을 넣어보고 껄끄러운 마음이 든다면 쓰면 안 된다”고 했다. 자당의 선거 승리를 위한 것이겠지만,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가르치듯 설명해야 하는 것이 정치 언어의 현주소다.
상대 정당의 치부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잔혹하거나 과도한, 때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유치한 정치권의 입씨름은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가열될 것이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새로 꾸려질 22대 국회가 어떤 존재들로 이뤄질지는 이미 정치인의 말로 가늠해볼 수 있다. 선택은 유권자의 몫이다.
양민철 산업1부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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