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만 당했는데 영역은 가장 넓다…'남양어족'의 비밀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2>]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인이 접하는 언어의 종류가 크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근대언어학이 발전했고, 비교언어학이 그 중요한 분야로 나타났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럽 언어들과 비슷한 특성이 많이 발견된 사실이 관심을 끌면서 비교언어학 연구가 시작되어 19세기 초에 ‘어족(語族, language family)’ 개념이 세워졌다.
인도-유럽어족을 필두로 여러 어족의 연구를 통해 언어학이 발전하는 가운데 주목을 끈 특이한 어족 하나가 오스트로네시아어족(Austronesian Language Family, 남양어족)이었다. 분포 영역이 가장 넓었다. 인도양과 태평양 대부분을 포괄하는 이 영역의 동쪽 끝 이스터섬(서경 109도)과 서쪽 끝 마다가스카르(동경 47도) 사이의 거리는 지구 둘레의 절반이 넘는다.
진화론이 유행하던 19세기 사람들에게 넓은 분포는 강한 힘의 증거였다. 인도-유럽어족은 인도, 페르시아, 유럽 등 구성원의 면면이 이 통념에 부합했다. 그런데 남양어족은? 남양인은 그 시대의 ‘열패자(劣敗者)’였다.
남양어족 언어의 분포 영역은 ‘문명’이란 이름에 부족함이 없는 넓이다. 그러나 이 영역의 주민들은 정치적, 군사적으로뿐 아니라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침략을 당하기만 하는 입장이었다. 종교조차 볼 만한 것은 모두 외래종교였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결격 사유는 문자기록이 변변찮고, 따라서 내세울 만한 자기 ‘역사’가 없다는 데 있었다.
‘남양어 팽창’의 진원지는 타이완
근대문명에 대한 불안감이 짙어지면서 ‘문명’의 의미에 대한 생각도 바뀌고 있다. 근대적 상황에 대한 적응력을 기준으로 문명의 우열을 논할 때는 유럽 기독교문명이 절대적으로 우월한 존재였지만, 지금은 오래된 문명들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 상대주의 관점이 자리 잡았다.
그래도 문명의 자격에 대한 암묵적 합의는 유지되고 있다. 독자적 역사서술을 갖지 못하고 수백 년간 모든 면에서 정복과 침략의 대상으로 지낸 남양인의 세계를 하나의 문명권으로 본다는 것은 아직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남양문명’의 존재를 잘라 부정할 수도 없다. 그 넓은 언어 사용권의 성립이 문명의 힘 없이 가능했겠는가? 넓은 영역에서 긴 기간에 걸쳐 특정 계열 언어의 사용 범위를 확장한 어떤 힘이 있었다면 그 힘이 곧 ‘문명의 힘’ 아니겠는가.
‘남양어 팽창(Austronesian Expansion)’은 남양어(남양어족의 제 언어) 사용권 확장이 특별히 빨랐던 단계였다. 기원전 1500-1000년경 타이완에서 출발해 동남아 일대에 확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남양어 사용자의 절대다수가 동남아 일대에 살고 있다.
타이완을 남양어 팽창의 출발점으로 보는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타이완 원주민 언어에 팽창기 이후의 문명 요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교적 늦게 발생한 개념들(도구, 작물, 가축의 이름 등)이 타이완 언어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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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열대 도서지역에 적합한 생활양식
남양어 팽창기의 상황을 그려본다. 신석기문명 확산으로 농업 발전이 빠르던 시기에 해양세력 남양인이 농업 발전의 주체 대륙세력에게 밀려나는 그림이 얼른 떠오른다. 그러나 농업 발전이 빠르고 늦은 것은 상대적 차이였다.
남양인에게도 농업이 있었고 그 확산의 동력이 농업에서 나왔다. 그들은 여러 가지 작물과 가축을 여러 섬으로 가져갔고, 거기서 얻은 생산력이 먼저 살고 있던 원주민을 몰아내거나 흡수하는 힘이 되었다.
다만 남양인의 농업과 대륙세력의 농업 사이에 단계 차이가 있었다. 대륙세력은 수리-관개를 통한 집약농업을 발전시키고 있었는데, 해안과 도서 지역 자연조건은 이에 적합지 않았다. 남양인은 집약도 낮은 농업과 어로-채집의 병행으로 아열대 해양지역의 자연조건에 적합한 생활양식을 키워냈다. 그래서 대륙에서 밀려나며 해양으로 확장해 나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그려보며 또 하나 수수께끼의 해답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동서로 멀리까지 퍼져나가면서 왜 가까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에는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수수께끼다. 뉴질랜드에는 꽤 늦게(1250년경) 들어갔고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정착한 흔적이 없다.
남양인이 도서 지역에 전파한 농작물은 벼와 구근류 등 열대-아열대 작물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농업에 적합한 동남부)와 뉴질랜드는 온대 지역이다. 어쩌다 그런 곳에 발길이 닿아도 열대 지역에서 가져간 작물로 원주민보다 유리한 조건을 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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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국도 언젠가는 ‘남양’ 자체였을까?
열대-아열대 지역의 섬들은 온대 지역의 선진 농업세력에게 밀려난 남양인을 위한 최적의 틈새였다. 집약농업의 발전이 아직 아열대 지역에 이르지 않은 상황에서 주어진 이 틈새는 대륙세력의 계속된 농업기술과 정치조직 발전에 따라 꾸준히 줄어들었다.
동남아의 남양어 사용이 해양부(Insular Southeast Asia, 말레이반도 포함)에 집중해 있는 것이 그 결과다. 어느 시기에는 대륙부(Mainland Southeast Asia)에도 널리 분포해 있다가 대륙 농업문명의 압력 증대에 밀려난 것이다.
동남아 대륙부와 기후와 지형 등 자연조건이 비슷한 중국 남해안 일대의 상황은 어땠을까? 이 지역에도 어느 시기에 남양인이 살고 있다가 한화(漢化)의 긴 역사를 통해 그 흔적이 지워진 것은 아닐까? 해협 양쪽에 살던 남양인 집단 중 한쪽은 사라지고 한쪽만 남은 것이 타이완 원주민 아닐까?
최근 량저(良渚)문화 유적에서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나왔다. 량저문화는 기원전 3400-2250년 기간에 장강(長江) 하구 일대에 분포했던 신석기문화로 1936년 발견된 량저 유적을 비롯해 수십 개 유적이 발굴되었다. 성곽 형태와 부장품의 내용 등을 근거로 중국에서 국가 형태의 완성에 가장 앞섰던 신석기시대 문화로 주목받아 왔다.
장강 유역 여러 유적에서 채취된 인간 유전자 분석 연구가 2007년 시작되었다. 량저문화 유적의 시료에서 “Haplogroup O1-M119” 유형 Y-염색체 빈도가 높게 나타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이 유형 염색체의 존재는 동남아의 남양인 및 크라-다이(Kra-Dai)인과 가까운 혈연관계를 시사한다.
관련 연구가 계속 진행되고 있어서 머잖아 더 많은 연구결과가 기대되는데, 남중국과 동남아 사이의 가까운 관계가 많이 밝혀질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된다면 남중국 고대사에서(어쩌면 중세사까지) 중국사보다 남양사의 맥락으로 읽을 측면을 많이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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