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회 묵인한 박정희, 제대로 통한 전두환의 아부

이준목 2024. 3. 8.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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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이준목 기자]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하나회'는 군사정권 시절 대한민국 육군 내에 존재했던 비밀 사조직이다. 정치군인들이 주축이 된 하나회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 이후 반란세력인 '신군부'를 형성하며 12·12 군사반란, 5·18 광주 민주화운동 학살 등을 주도했고, 군사정권의 연장인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하나회는 1990년대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인한 숙군(肅軍) 작업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흑막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드라마 <제 5공화국>, 영화 <서울의 봄> 등을 통하여 재조명되기도 했다. 국가와 국민들을 지켜야 할 군인들은 왜 사조직을 결성하여 나라를 배신하는 반란까지 일으켜야만 했을까.

3월 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하나회의 시작 그리고 끝'을 통하여 하나회의 흥망성쇠로 돌아본 격동의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조명했다.

하나회의 시작과 박정희의 신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하나회는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 노태우 등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들과 그 후배들이 주축이 되어 탄생됐다. 본래의 취지는 '하나가 되어 한마음 한뜻으로 국가에 충성하자'는 의미로 시작했다고 한다. 6·25 전쟁 등으로 인하여 체계적인 장교 육성 시스템이 부족했던 선배 세대와는 달리, 11기는 최초로 정규교육 4년을 모두 마치고 임관한 첫 세대로 '우리가 진정한 육사 1기'라는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고 전해진다.

하나회 멤버들은 맹세의 의미로 단도를 나눠가지며 배신을 하거나 부정한 행위를 하면 스스로 자결하여 죽음으로써 명예를 지킬 것을 다짐했다. 또한 하나회 멤버들은 후배 기수가 들어오면 철저한 뒷조사를 통하여 학교 성적, 교우관계, 집안 환경 등 사생활까지 미리 꼼꼼히 확인했다. 재능있는 인물은 처음엔 선후배 관계로 접근하여 챙겨주다가 대위쯤 진급했을 무렵에 하나회 멤버로 본격적인 포섭을 시도하는 식이었다.

하나회를 연구한 서청경의 논문인 <한국정치의 후견인-수혜자 관계>에 따르면, 하나회에 가입한 인물은 은밀하게 초대를 받아 모인 장소에 가면 11기 회원들이 모두 모여서 일렬로 앉아있었고 그 중심에는 회장인 전두환이 있었다고 한다. 새 멤버들은 '반드시 혼자 가서 무릎을 꿇고는 국가와 조직에 충성한다는 선서를 하게 했다. 그리고 선배가 따라준 붉은 포도주 한 잔을 마시면 그것으로 하나회 회원이 된 것'이라고 증언했다.

설립 초기에 가벼운 친목모임 정도로 시작했던 하나회는 어느새 회원이 100명을 넘긴 거대조직으로 성장했다. 군법상 군 내 사조직은 엄연한 불법이다. 그럼에도 하나회의 존재와 급격한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사실상 군 내부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윤필용(1927-2010)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청와대 밖 대통령'으로까지 불리던 군부실세였다. 그는 하나회의 존재도 진작에 알았지만 이를 묵인했다. 하나회는 11기보다 선배인 윤필용을 큰 형님이자 후견인으로 깍듯이 모셨다고 한다.

하지만 윤필용은 1973년 4월 돌연 박정희 정권에 의하여 전격적으로 숙청당한다. 윤필용이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의 술자리에서 "요즘 각하(박정희)가 노쇠하셔서 이제 슬슬 물러날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 뒤를 이을 사람은 형님(이후락)이 계시지 않나"는 말을 한 것이 박정희의 귀에 들어간 게 원인이었다.

박정희는 이를 사실상의 '반역모의'로 규정했고, 실제 법정에서는 횡령 및 특정범죄가중 처벌법 위반 등의 죄목을 뒤집어씌워 윤필용을 몰락시킨다. 윤필용은 측근이던 장교 10여 명과 함께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과 처벌을 당했고 여기에는 윤필용의 참모장이자 하나회 창립멤버인 손영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하나회의 존재도 발각된다. 윤필용이 실질적으로 쿠데타 모의 혐의로 숙청된 만큼 전두환과 하나회로서도 최대의 위기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박정희는 하나회를 묵인하고 내버려뒀다. 사실 박정희는 진작부터 하나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박정희는 오래전부터 전두환을 눈여겨보고 총애했다.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당시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생도들은 쿠데타를 군사혁명으로 지지한다는 선언을 하며 시가행진까지 펼쳤다.

또한 박정희는 집권 이후 전두환에게 정치 입문을 제안했지만 전두환은 "군에도 각하를 위한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부하며 박정희의 마음을 더욱 흡족하게 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하나회를 조사하려던 당시 강창성 보안사령관을 오히려 좌천시키고 수사를 중단시켰다. 전두환은 살아남았을뿐 아니라 훗날 강창성이 맡았던 요직인 보안사령관 자리까지 꿰차며 군부의 정보라인을 장악하게 된다. 보안사령부는 '군대 내의 중앙정보부'로 불리우며 훗날 전두환의 쿠데타와 집권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훗날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전두환은 윤필용을 숙청하는 작업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그는 육사 11기와 하나회 동기인 손영길이 덩달아 사건에 휘말리며 몰락하는 것도 묵인했다. 이에 대하여 손영길은 "아마 전두환의 욕심이었을 것이다. 자기가 항상 내 뒤에 따라오고 그러니까 앞서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지, 내가 전두환을 많이 잘못 봤다"고 평가하며 씁쓸해했다.

하나회의 중심이자 리더였던 윤필용과 손영길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며 이제 전두환은 진정한 하나회의 1인자로 올라섰다. 전두환은 리더십이 뛰어나 주변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며 철저한 '군맥관리'로 자신의 영향력을 더욱 키워나갔다.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두환은 후배들을 위하여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온갖 문제를 직접 해결해줬다고 한다. '그의 후배나 동료관리에는 천부적인 정성이 녹아있었다'는 게 당시 후배들의 실제 평가였다. 이에 전두환을 추종하는 후배들은 점점 늘어나 그의 말이면 무조건 충성하는 친위 세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사권 틀어쥐고 권력 장악한 전두환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무엇보다 전두환이 군내에서 가진 가장 큰 권력은 인사권이었다. 철저한 계급사회인 군대에서 빠른 진급과 좋은 보직은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두환은 모든 정보를 틀어쥔 보안사의 힘을 이용하여 진급대상자에 포함된 모든 군인들의 개인 신상명세를 사찰했고, 그 자료는 '존안 카드'라는 이름으로 박정희에게 보고되어 실제 인사에 중요하게 반영되었다고 한다.

전두환은 자신이 장악한 하나회 출신들을 요직에 잇달아 천거한 반면, 비 하나회 출신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진급과 보직에서 철저히 차별대우를 당했다. 자연히 하나회는 군 내부에서 꽃길이 보장된 엘리트 사조직으로 부상하며 많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1979년 10·26사태가 발발하며 박정희 정권이 몰락한다. 당시 참모총장이던 정승화 장군은 계엄사령관에 올라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몰아내고 군체계를 바로 세우려는 계획을 진행했다.

정승화 총장과 최규화 대통령은 하나화의 리더이자 군부실세였던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좌천시키고 서서히 하나회를 숙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군부 요직들을 대거 장악한 하나회는 정승화 측의 움직임을 사전에 눈치채고 있었고 선수를 치기로 결정한다. 바로 12·12 군사반란의 시작이다.

먼저 반란군은 총격전 끝에 정승화 총장을 강제로 납치했다. 이어 이건영 3군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등도 잇달아 붙잡히면서 군사반란은 약 10시간 만에 반란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군사반란에 성공한 하나회는 '신군부'로 등극하여 대한민국의 권력을 모두 탈취했다. 소장이었던 전두환은 약 6개월 만에 4성장군으로 진급했고, 이듬해 전역하고 정치로 진출한다.

1980년 9월 1일, 전두환은 국민의 직접선거없이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회의를 통하여 만장일치로 추대되며 대한민국의 11대 대통령에 취임하니, '제 5공화국'의 시작이었다. 또한 군사반란에 동참했던 하나회 회원들은 전두환와 함께 청와대로 입성하거나 군의 요직을 장악한다.

하나회는 이후 전두환과 그 뒤를 이은 노태우의 6공화국 정권을 거치며 정계와 군부를 장악하고 오랫동안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그토록 영원할 것 같았던 하나회의 전성시대도 몰락의 순간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 숙청된 하나회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가 출범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과 함께 대표적인 민주화 인사 출신이었으나, 1990년 3당 합당을 통하여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손을 잡고 여권이 됐다. 당시 야권은 김영삼의 결정을 군사정권과 야합한 배신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결정을 굽히지 않았다. 김영삼은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마침내 대한민국의 14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하나회 측은 김영삼 정권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초반에는 '그래도 이제는 같은 당인데' 정도로 생각하여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이후 전두환-노태우를 앞에 두고서 "다시는 이 나라에 정치적 밤이 없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라고 선언하는가 하면, 얼마 뒤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는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찾아주는 일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며 연이어 의미심장한 발언들을 남겼다.

김 대통령은 3월 8일, 권영해 국방부 장관과의 조찬 독대에서 대뜸 "기무사령관(보안사의 후신)은 언제 바꿀 수 있냐"고 질문했다. 권 장관은 "국군 통수권자가 통수권을 행사하시면 언제든 바꿀 수 있다"고 답했고, 그러자 김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면 육군 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 오늘자로 바꿉니다"라고 전격 선언했다고 한다. 하나회 숙군작업의 시작이었다.

당시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은 전두환이 주도한 하나회의 핵심멤버들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단 4시간 만에 7개의 별(장성)이 떨어졌다. 이후 한 달도 안 되어 특전사령관과 수방사령관도 교체됐다. 무려 다섯 번에 걸쳐 이루어진 군핵심 요직의 교체는 모두 하나회 핵심 인사들이 타깃이었다.

마치 007작전처럼 전격적으로 단행된 숙군작업은 정권 내에서도 극소수의 인사들만이 알고 있었다. 김 대통령은 인사조치를 단행한 이후 한 측근에게 "어때? 깜짝 놀랐제?"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기며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김 대통령은 하나회 멤버들이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 전광석화같이 숙군 작업을 단행했다. 어설프게 일을 처리했다가는 군을 동원할 수 있는 하나회 인사들이 또다시 12·12같은 군사반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덕룡 당시 정무장관은 "하나회 척결이 흔히들 우연히 이루어진 것으로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즉흥적인 깜짝쇼로 진행된 게 아니다"라고 밝히며 김영삼 정부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회의 명단을 파악하고 치밀하게 작업을 준비한 것으로 설명했다.

숙군 작업이 한창 진행되는 중에 기묘한 사건까지 발생한다. 1993년 4월 2일 서울 동빙고동의 군인아파트 옆에서 하나회 20기에서 36기까지의 회원 명단이 기록된 전단지가 뿌려지는 '하나회 명단 살포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살포자는 육사 31기 비 하나회 출신 대령인 백아무개씨였다. 이는 군 내부에도 하나회의 전횡과 권력독점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또한 그동안 세간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하나회의 존재도 대중들에게 처음 알려지게 된다.

문민정부는 당시 90%에 이르는 압도적인 국민적 지지율을 바탕으로 하나회 척결 작업에 더욱 속도를 높였다. 약 2개월 사이에 무려 60여 명의 장성이 옷을 벗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하나회 세력의 반발에 대하여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는 특유의 화법으로 개혁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또한 하나회 척결 작업은 자연히 이들이 주도한 12·12 군사반란에 대한 재조사 여론으로 이어졌다. 하나회에 의하여 탄압받았던 강창성, 정승화, 장태완 등 당시 대표적인 군 주요인사들이 나서서 하나회의 만행을 밝히는 데 앞장섰다.

당시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장태완 전 사령관은 "주동자는 역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다. 군사반란은 명분없는 사리사욕에 불과하다. 일개 소장들이 자기 명분을 찾는다고 하면 이 군대와 나라가 남아나겠냐"며 군사반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일침을 놓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를 선언하며 "12·12를 군사 쿠데타"로 확실하게 규정했다. 신군부의 대표적인 악행인 12·12와 5·18에 대한 재조사도 진행됐다. 전 대통령인 전두환과 노태우 등 하나회 출신 신군부세력 38인에 대한 고소장이 접수됐다.

법정에 서게 된 신군부 세력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회에 대해서도 친목 모임에 불과하다고 변명했다. 재판부는 이들의 반란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하지만 법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늦게나마 반성하고 사죄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형이 인정되고 약 8개월 만에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주요 인사들은 모두 특별사면 조치를 받았다. 역사바로세우기는 그렇게 용두사미로 막을 내렸다. 이에 당시 정부는 '국민대화합'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다수의 국민들은 공감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정치군인 집단이었던 하나회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숙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두환은 사면 이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추징금 남부를 거부했다. "전 재산이 29만 원밖에 안 된다", "숨겨 놓은 게 있는지 마당 가서 파보면 되지 않냐" 등의 반성없는 망언으로 국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기도 했다.

전두환은 2021년 11월 23일,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회의 영원한 보스로 남았다. 하나회에게 '영원한 충성'의 대상은 국가가 아니라 전두환 개인에 불과했다.

손영길 장군은 하나회라는 이름이 부정적으로 거론될 때마다 창립멤버로서 "마음의 가책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그는 "하나회는 자기 이익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회 때문에 호강한 놈들이 있다. 사람이 올라가면서 마음의 때가 낀 것이다. 한마음 뜻으로 올바른 길을 걸어갔다면 왜 욕을 먹고 존경을 못 받겠나"라고 비판하며 깊은 회한을 드러냈다.

손영길은 2011년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을 요청하여 38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 5억을 모두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 기부했다. 후배들이 자신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고 군인으로서의 초심을 지키기를 바라는 선배의 마음이었다.

하나회는 애초에 있어서는 안 될 조직이었을까. 아니면 변질이 된 게 나쁜 것일까. 분명한 것은 하나회 회원들에게는 한때 인생의 황금같은 기회를 열어준 '로또'였을지 모르지만, 역사의 평가는 그들을 '오점'으로 영원히 기억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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