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학생의 글에서 '교실로 들어갈 힘'을 얻다
박희정 2024. 3. 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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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정 기자]
숨이 안 쉬어질 때가 있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바위가 나를 덮쳐 와 그대로 바닥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드는 3월의 학교가 원인이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때에 잠시라도 내 역할을 못해내면 다른 사람에게 곧장 폐가 간다. 긴장의 연속이다. 이런 때는 이 바위를 들기보다 그냥 도망치고 싶어진다. 머릿속으로 내가 쓸 수 있는 여윳돈과 내가 갚아야 할 대출도 가늠해 본다. 언제까지 어떤 상태로 살지 모르니 끝도 없이 걱정이 이어진다.
어지러운 마음으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백석 시)을 가르친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질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위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전문
학생들도 3월 첫 주가 힘이 드는지 좀처럼 시 속으로 녹아들지 못한다. 한때 명동 거리에 나타났다 하면 연예인 뺨치는 아우라로 주름잡던 백석이 왜 이토록 무기력하게 남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면서 갈대를 엮어 만든 낡은 깔개 위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걸까?
고통은 크기로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지만 그럼에도 느닷없이 그가 겪는 고통과 나의 고통을 견줘보게 된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느냐, 어느 부모 아래 태어났느냐?로 8할의 성취가 결정난다(김현철)는데 백석은 나라를 잃은 상태에서 이미 절반의 성취를 잃어버린 상태다. 그럼에도 그는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면서 살아갈 힘을 회복한다.
학생들에게 이 시를 가르칠 자격을 갖추려면 그것은 교원자격증도 임용고시도 아니란 마음이 들었다. 경제적 여건을 떠나 내게 부여된 과업을 피하지 않고 맞서는 일, 활자가 아닌 삶으로 학생들 앞에 서는 일, 그것부터 갖춰야 한다. '갈매나무'가 되어야 한다. 그날 저녁 1학년 여고생이 글을 하나 보내왔다.
매일 아침 맞이하는 것은 밝은 햇살이다. 눈이 떠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준비를 하려니 몸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몸을 이끌며 밖을 나선다. 매일매일 똑같은 수업, 규칙, 이야기. 이것들은 나를 지루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오늘은 조금이라도 다른 날일까? 재밌는 일이 일어날까?'라는 기대를 하기도 하지만 결국 무너져버린다. 학교가 끝난 뒤에도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학원을 간다. 무거운 것들에 지친 상태에서 집에 들어가 나를 반기는 것은 캄캄한 동굴이다.
동굴에 또 무기력해지려는 그때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작은 빛이다 작은 빛이 점점 커진다. 캄캄한 동굴이 밝은 빛으로 덮여진다. 그 순간 들리는 엄마의 한 마디! "오늘 수고했어" 그 한 마디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힘든 하루가 의미 있는 하루로 바뀐다.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한 말 한 마디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학생의 글이 내게 '갈매나무'가 되어 다시 교실에 들어갈 힘을 준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야겠다는 용기도 준다. 그렇게 삼월의 첫 주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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