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자리를 양보 받고 생각한 것

최승우 2024. 3. 8.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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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대접'과 '어른 노릇'이 오갔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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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우 기자]

매주 화요일은 은퇴 후 보내는 일상의 한가함과 달리 은퇴 전의 일상으로 하루가 바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서학 예술마을 도서관에서 자원 활동가로 일하고 오후 2시부터 4시간 동안 아파트 작은 도서관에서 봉사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아침 출근은 튼튼한 두 다리를 통한 뚜벅이로 약 8,000보의 거리를 한 시간 가량 걷는다. 오후 이동 수단은 한 시간의 짧은 시간에 점심을 해결하고 거주지 근처 작은 도서관에 도착해야 해서 버스를 이용한다.
 
 자원 활동가 명찰
ⓒ 최승우
 
점심시간의 버스 승객은 대체로 많지 않다. 그러나 오늘은 예외적으로 빈자리 없이 승객이 자리하고 있다. 잠시 후 여학생 둘이 서 있는 곳에 빈자리가 난다. 학생이 자리 앉기를 권한다.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자 "저희는 곧 내려요!"라며 자리를 양보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양보한 학생도 자리를 잡았고 나보다 불과 한 정거장 전에 내렸다.

여학생은 하얀 거짓말로 자리를 양보했다. 학생의 배려에 고마움과 함께 또 다른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마스크와 모자로 가려진 모습으로 나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을 텐데 "내가 그렇게 늙어 보였나?"라는 의구심이 든다. 한편으로 가려지지 않은 하얀 귀밑머리와 눈가의 주름이 세월의 흔적으로 여겨져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사실 아무리 부인해도 세월의 흐름은 인간의 의지로 피할 수도 어찌 해 볼 수도 없는 영역이다. 나 역시 시력이 나빠져 안경을 쓴 지 오래 되었고 하늘을 향해 곧게 뻗었던 말총머리는 숨이 죽어 얌전하다. 수북했던 머리는 가을 단풍이 떨어지듯 지상으로 낙하하여 정수리는 맨살이 드러나려 하고 있어 정수리 보수 공사를 위한 탈모약을 복용하는 중이다.

검은 머리카락은 귀밑과 머리 선을 따라 희끗희끗하고, 송충이 같았던 검은 눈썹은 중국 무협 영화 속의 길고 흰 눈썹의 도사까지는 아니나 몇 가닥의 흰털이 터를 잡고 있다.

젊은 시절 멀게만 느꼈던 '죽음'이라는 단어도 심심치 않게 떠오른다. 시력과 운동 능력의 약화, 기억력 감퇴와 고집스러움 등 노화에 따른 육체적 · 정신적 변화를 누군들 비껴갈 수 있을까?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고 유년기에서 시작하여 노년기에 이르는 인생 순환 과정에 그저 순응할 수밖에 없다.
  
 거리에서 잠시 쉬고 있는 노인
ⓒ 최승우
 
내가 걷는 길에서 바라보는 익숙한 반대편 풍경이 정작 반대편 길을 걷다 보면 생소한 풍경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같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정면 혹은 대각의 시선에 따라 마주하는 장소가 다르게 보인다. 상황에 대한 인식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일상의 삶 속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믿음으로, 혹은 '60 청춘'이라는 구호 속에 젊은이 못지않게 하루하루를 활기차게 보내고 있다. 나는 시력과 머리숱 그리고 관절과 혈압의 문제가 있지만 여전히 꼿꼿한 허리와 낭랑한 목소리는 젊은 시절과 크게 다름없다.

아직도 지적 허영심이 충만하여 독서를 좋아하고 어설프지만, 글쓰기의 즐거움도 느낀다. 다른 한편으로 여학생의 작은 배려가 "그래! 나는 노년의 삶을 살고 있구나"라는 삶의 순간을 일깨워 주었다. 한편으로 잊고 있었던 '노인 노릇', '어른 노릇'에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M. 드레들러는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얼마나 늙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늙어 있는가이다'라고 하였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어른 노릇'이라는데 과연 어른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고정 관념과 편견으로 무장한 단단한 갑옷은 입고 있지 않은가? 고집스러움으로 굳게 닫힌 입으로 대화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혹은 '라떼(나 때)'를 외치며 과거에 매몰된 '꼰대'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바라건대 오랜 연륜과 경험이 빚어낸 지혜를 갖춘 어른이 되고 싶고 세대 차를 극복하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호흡하는 '노인'이 되면 좋겠다. 그렇게 세월과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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