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잃은 낙원', 그야말로 천연 감옥

박배민 2024. 3. 8.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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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유산 탐방기] 영월 단종 유배지 '청령포'

[박배민 기자]

 ▲ 관음송 앞에서 촬영한 단종어소(오른쪽)와 단묘재본부시유지비(왼쪽) ⓒ박배민
ⓒ 박배민
 
📌 영월 단종 유배지(청령포)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 68
시대: 조선
유산: 청령포(명승), 관음송(천연기념물)
탐방일: 2024년 1월 21일

가족과 함께

매년 설에 친가와 외가를 번갈아 찾아뵙는데, 올해는 충북 진천에 위치한 외가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에게 당일치기 영월 나들이를 가볍게 제안했고, 할머니, 어머니, 외삼촌 그리고 7살 된 사촌 여동생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동참했다.

가족들은 문화유산에 크게 관심이 없어 단순히 놀러 간다는 사실에 흥분했지만, 영월을 처음 방문하는 나에게는 단종이 갇혀 지낸 장소와 비운의 왕이 잠들어 있는 곳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하얀 소나타에 몸을 맡긴 우리 일행은 평택-제천 고속도로를 달려 1시간 남짓 만에 광혜원에서 영월에 도착했다.
   
 ▲ 매표소에서 내려다 본 선착장과 운항 중인 청령호
ⓒ 박배민
 
청령포, 아름답고도 고독한

영월의 문턱을 밟자마자 향한 곳은 단종이 영월로 쫓겨나 처음 두 달여를 보낸 청령포였다. 청령포는 고속도로 나들목에서 가깝기도 했고, 역사적으로도 단종의 첫 유배 생활 공간이었기에 장릉 방문 전에 살펴보는 것이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예상보다 매서운 찬바람에 적잖이 당황했다. 넓게 펼쳐진 청령포 주차장을 가로질러, 매표소에서 만 원 즈음에 일행의 입장권을 구입했다. 단종의 처소를 둘러보기 위해서는 50여 m 폭의 강을 건너야 했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수십 개의 계단이 유일했다. 보행기 없이 걷기 힘든 외할머니는 계단을 밟으며 내려가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불평 한 마디 없이 묵묵히 내려가셨다.
 
 ▲ 청령호에서 내려 어소를 향하는 일행. 자갈밭 끝 소나무 숲 안에 어소가 있다.
ⓒ 박배민
 
단종 어소를 오가는 배 두 척이 선착장에는 정박 중이었는데, 이용객이 많지 않아 '청령호' 한 척만이 운항 중이었다.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엔진 옆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청령포를 둘러싼 절벽이 위엄있게 나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2, 3분이면 도달할 짧은 거리를 건너는 동안, 강물의 투명함과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강바닥 속 자갈이 눈길을 끈다. 서강이 굽이쳐 흐르며 만들어 낸 자갈밭은 쓰레기 하나 없이 말끔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단종은 무슨 심정이었을까. 

청령포는 '자유를 잃은 낙원'이라는 역설적 표현이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배가 드나드는 선착장을 제외하면 3면이 벼랑으로 이루어진 천연 감옥이었다. 육지와 연결된 부분마저 층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섬과 다름없는 고립된 지형이었다.
      
 ▲ 소나무 숲과 자갈밭 경계에서 촬영한 사진. 소나무 사이로 언뜻 어소가 보인다.
ⓒ 박배민
 
할머니와 함께 느릿느릿 자갈밭을 거쳐 소나무숲으로 다가가니 단종이 두 달 간 머물렀다는 처소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홍수 때문에 관풍헌(영월 관청, 단종이 사망한 장소)으로 거처로 옮기 전까지 단종이 두 달간 지냈던 건물은 우람한 소나무에 파묻혀 있었다.
단종 어소는 승정원일기를 토대로 팔작지붕에 측면 3칸, 정면 5칸으로, 총 15칸짜리 집으로 복원되어 있었다. 작지 않은 기와집이었지만, 부속 건물이 없는 탓에 위세가 작게 느껴졌다. 어소 내부는 이불과 옷가지 등을 통해 당시 생활상을 재현하고 있었고, 단종과 임금을 알현하는 충신의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표현하고 있어 방문객의 상상력을 돋우었다.
 
 ▲ 단종 어소를 둘러 보는 방문객
ⓒ 박배민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에는 금성대군(수양대군 동생)을 주축으로 진행된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단종은 노산군 신분에서 서인(庶人, 일반 백성을 뜻함)으로 강등되었다. 끝까지 조카를 지키려던 삼촌 금성대군은 안타깝게도 관노(官奴, 관청에 소속된 국가의 노비)의 고발 탓에 거사가 발각되어 반역죄로 처형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단종 곁을 지키던 노비들이 살았던 초가집도 재현되어 있었다. 어소와 마찬가지로 공간에 생생함을 더하기 위해 노비가 일하는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꾸며둔 게 인상적이었다. 일곱 살배기 동생은 왜인지 집에서는 안 하던 세배를 밀랍인형한테 한다.
 
 ▲ 노비 집에서 바라 본 단묘재본부시유지비
ⓒ 박배민
 
터를 기억하다, 단묘재본부시유지비

마당 한복판에는 단종의 어소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기리기 위해 영조가 세운(1791) 비석이 중앙에 우뚝 서 있었다. 서인의 신분까지 추락했던 단종은 숙종 대에 왕의 위상으로 복권되는데, 숙종의 아들인 영조가 아버지의 의지를 계승했던 것이다.

'단묘재본부시유지비'라 새겨진 이 비석의 글자는 영조가 직접 쓴 글자라고 전해진다고 한다. 비석의 재료는 오석(烏石)인데, 벼루를 만드는 검은 그 돌이 오석이다. 비의 앞면에는 '단종께서 영월에 계실 때의 옛터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고, 뒷면에는 '(전략) 계미년(1763) 9월 눈물을 닦으며 삼가 써서 원주 감영(지금의 도청)에게 명하여 비를 세우다. 지명은 청령포이다'라는 내용이다.
 
 ▲ 관음송은 주변 나무에 비해 존재감이 도드라지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 박배민
 
애처로움을 간직한 나무, 관음송 

단종이 생활하던 어소 옆에는 소나무 중에서도 유독 하늘 높이 뻗은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나이는 대략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가 30m로 아파트 10층에 육박한다. 

단종이 청령포 유배지에서 지내던 당시 둘로 갈라진 관음송 줄기 사이에 걸터앉아 마음을 추슬렀다고 한다. 이 소나무는 관음송이라 불리고 있는데, 단종의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하여 '관(觀, 볼 관)', 또한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들었다 해서 '음(音, 소리 음)'을 붙여, 관음송이라 한다.
 
 ▲ 영조가 세운 금표비. 비 옆에 화장실을 설치한 탐방로 설계가 아쉽다.
ⓒ 박배민
화장실로 가는 길에, 낡은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비갓(비 머리에 얹은 돌)은 깨지고 이끼로 뒤덮여 있어, 비갓과 비신(비 몸체)이 서로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인다. 허름해 보이는 비갓과 대조적으로 비신은 마치 물 위에 석유를 풀어놓은 듯한 화려한 무늬를 뽐내고 있었다.
이 작은 비석은 일반 백성의 출입을 금지할 목적으로 세워진 금표비였다. 이 역시 영조의 지시로, 당대 이름난 명필가이자 영월 부사(지금의 부시장급) 윤양래가 세웠다(1726). 금표비는 어린아이 크기만큼이나 작아, 높이가 약 1.1m, 너비는 40cm 정도였다. 앞면에는 '동서로 300척(약 90여m), 남북으로 490척(약 150여m) 이내로 백성은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를 새겼고, 옆면에는 1726년 10월에 세웠다는 기록을 남겼다.
 
 ▲ 청령호 위에서 바라 본 단종어소 방면
ⓒ 박배민
 
역사를 품은 벼랑

청령포를 떠나며 훌륭한 경치 뒤에 숨겨진 역사의 무게를 되새긴다. 평화로운 자연을 배경으로, 17살의 단종이 겪었을 내면의 혼란과 고뇌를 상상해본다. 14살에 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가, 2년 만에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억울함과 생명의 위협으로 점철된 단종에게 이 절경은 어떤 의미였을까. 적어도 나처럼 한적함을 느낄 장소가 아니었을 터. 자신의 운명을 되돌아보며 쓸쓸함과 고립만이 가득하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글 | 이 탐방기는 개인 채널(브런치 등)와 외부 채널에도 함께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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